매일신문

청정한 물의 고장 영해 신광

마북지 입구에 옮겨 심어진 700년 된 느티나무 당산목.
마북지 입구에 옮겨 심어진 700년 된 느티나무 당산목.

포항은 예로부터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으로 불렸다. 이러한 포항의 인상을 만들어낸 곳이 바로 신광이다.

◆아름다운 호수, 마북지와 용연지

신광이라는 지명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비학산에서 밝은 빛줄기가 찬란하게 뻗쳐 나오는 것을 보고 '신광'(神光'신령스런 빛)이라고 한 뒤 지금까지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신광은 흥해읍 마산리를 통해 갈 수 있는데 입구에서 용연저수지가 반겨준다. 1953년에 축조된 이 저수지는 만수 면적이 87㏊에 달하는 신광면의 가장 큰 저수지다. 용연지라는 이름은 못 상류 지역에 마치 용이 앉았던 것처럼 흔적이 있는 큰 바위가 있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흔히 호리못이라고 부른다. 이 일대는 매운탕집이 즐비한데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제방공사로 인해 저수지 물을 빼놓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서 신광면사무소를 지나 20여 분 오르면 마북지라는 또 다른 저수지가 펼쳐진다. 1955년에 축조된 만수 면적 12㏊의 저수지다. 괘령(掛嶺)으로 트인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저수지로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마북이라는 지명은 반곡이 역촌일 때 방사한 말들이 말발지재를 넘나들며 돌아다녔다고 생긴 이름이다. 저수지 입구에는 안동 권씨가 소반에 묘목을 얹어와 심은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다. 안동 권씨 가문에서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던 당산목이다. 이 느티나무가 마북지 확장공사로 침수될 위기에 놓이자 노거수회 등의 구명운동으로 1998년 남쪽 언덕으로 이식됐다. 수령이 700년이 넘어 1982년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신광은 포항뿐만 아니라 경북에서도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무려 63개의 저수지가 있다. 이 때문에 신광은 전국이 가물어도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지역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저수지가 논밭에 충분한 물을 공급해 주고 식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신광면사무소 정연학 담당은 "비학산과 용연지 등 아름다운 저수지와 다양한 문화유적 등이 즐비한 신광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함께 정신문화의 원형을 갖춘 보기 드문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라고 자랑했다.

◆비학산

알을 품고 있던 학이 날개를 펼쳐 비상하는 모습을 가진 산이 바로 비학산(飛鶴山'762m)이다.

동쪽으로는 너른 들판에 고만고만한 낮은 산들이 있고 서쪽으로는 이와 반대로 첩첩 산들이 이어져 있는 독특한 산세다. 옛날부터 많은 학이 떼를 지어 보금자리를 이뤄 왔으며, 지금도 머물고 있는 이름 그대로 학의 산이다.

포항 북구 신광면과 기계면, 기북면의 경계에 있는 비학산에는 신령스러운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

산 정상에 봉우리가 있고 동편 중턱에 작은 산 모양의 불룩한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의 등잔혈에 묘를 쓰면 자손이 잘된다고 했으며, 특히 등잔혈에 묘를 쓰고 가까이 있으면 망하고 멀리 떠나야 잘된다는 전설과, 비학산에 묘를 쓰면 가물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학산은 포항 일대 가뭄 해갈에도 신통스러운 힘을 발휘했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 중턱에 돌로 쌓은 제단인 무제등이 있는데 가물 때면 관민이 힘을 모아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려 단비를 갈구했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내던 무제등은 현재 소박한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비학산은 포항의 대표적인 등산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래서 법광사에서 비학산 정상까지 우거진 수목과 아름다운 경관, 맑은 물의 정취에 매혹돼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쪽 자락에는 신라 26대 진평왕 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법광사지가 있다. 비학산의 산행 기점은 1천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법광사다. 신광버스정류소에서 들판길을 북서쪽으로 3㎞, 도보로 약 1시간가량 걸으면 고목에 둘러싸인 조촐한 법당에 도달한다.

법당 뒤 산행안내도가 가리키는 왼쪽 길은 무제등과 누운바위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만나게 되고 50분이면 전망대 바위에 이른다. 여기서 50분이면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에서의 하산은 남쪽 능선인 무제동으로 내려올 수도 있고 북동쪽 능선으로 10분 소요되는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법광사로 내려간다.

신광면 만석리에 알칼리성 유황온천인 신광온천과 비학산테마랜드가 있어 산행 후 온천욕과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꽃 법광사

신광면 상읍리 비학산 둘레길 초입에 법광사(法廣寺)가 있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옛 법광사 자리에 지난 1952년 새로 세운 절이다.

2008년 사적 제493호로 지정된 법광사지는 현재의 법광사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법광사와 관련된 재밌는 설화가 전해진다.

웅장하던 옛 법광사가 조선 철종 14년(1863년) 토호의 부탁을 받은 초부의 방화로 소실됐다고 하는데 법광사가 소실되기 3개월 전, 신광면 죽성리에 거주하던 박기래(朴耆來)라는 소년이 어느 날 밤 마당에 나갔다가 이상한 일을 목격했다.

법광사 쪽에서 큰 불덩이가 비학산 꼭대기까지 치솟아 그 일대를 대낮같이 밝히더니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소년은 이튿날 풍수인 서씨 노인에게 이 광경을 얘기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크게 탄식하며 "이제 법광사 기운이 다한 모양이구나, 법광사는 곧 폐사될 것이고 같은 지맥에 놓인 천곡사도 폐사될 게 틀림없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3개월 후에 법광사가 불에 타 폐사됐으며 신기하게 천곡사 역시 6'25전쟁 때 소실됐다.

원효가 왕명에 의해 창건했다고 전하는 법광사는 당시에는 대웅전과 2층 금당, 향화전, 5층 석탑 등 525칸이 넘는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 법광사지엔 석가불사리탑, 연와석불좌대, 쌍두귀부, 당간지주와 조선 영조시대에 세운 사리탑중수비 등 몇몇 석조 유물만 남아 옛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법광사지는 아직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냉수리 고분과 냉수리비

용천저수지 옆에 있는 냉수리 고분은 신라시대(6세기 전반경) 고분으로 한강 이남에서 발굴조사된 횡혈식석실고분으로는 최대 규모다. 부실 등의 독특한 내부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관장식, 영락, 금반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이 지역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국보264호로 지정된 냉수리비가 있다. 이 비는 1989년 4월 6일 신광면 냉수리 마을 주민이 밭갈이하던 중 평소 걸림돌이 된 것을 파헤쳐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옮겨 물로 씻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 행정기관에 신고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 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마모됨이 거의 없고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다.

비문의 내용은 이렇다.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년 9월 25일 지증왕 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해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뒤에는 아우 아사노 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재산이 상속되고 미추, 사신지는 재물 분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했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계미라는 간지와 지증왕 등 각 칭호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지증왕 4년(503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국가에서 세운 비로 당시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는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고비다. 고르지 못한 네모꼴의 자연석 앞, 뒤, 위 3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매행별 글자 수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앞면은 12행 152자, 뒷면 7행 59자, 윗면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다. 국보 제242호인 울진 봉평 신라비(524년)와 더불어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은 신광면사무소 마당에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신광면민 축구대회

신광면에는 민족의 정신을 이어오는 독특한 축구대회가 있다.

36년간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조국을 잃은 민족의 울분과 아픔을 축구를 통해 푼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한민족의 결속과 단결을 보여주며 면민의 일치된 애국심을 나타내고자 고인이 된 이석백, 이오특, 이병섭, 김진곤, 김학수, 여이도, 정수만, 이희욱, 김유만, 차인수, 이규섭 등에 의해 축구붐이 조성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이희욱, 차인수, 이병섭, 이규섭은 조국 광복의 기쁨을 후대에 남기고자 1947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면민 친선축구'라는 명칭으로 이 대회를 시작하게 됐다. 이 대회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민간사회단체 주최로 지금까지 64회째 이어져 오고 있다. 광복기념 대표 축제로 이제는 신광면민과 더불어 포항시민의 자긍심으로 자리매김하는 대회가 됐다.

지금은 신광면민뿐만 아니라 외지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출향인사들이 자녀를 데리고 고향을 방문해 축구경기에도 참여하고 가족, 친지, 고향 친구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 형제와 자녀가 한 팀을 구성해 경기를 함으로써 가족애를 높이는 촉매제 역할도 하고 있다.

면 단위에서 광복절마다 전 면민과 출향인이 모여 축구를 통해 광복을 기념하고 화합을 다지는 곳은 신광면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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