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년 달성 스토리로드] ⑨하빈면

세조 거부했던 사육신 박팽년…문서 올릴 때 臣 대신 巨 라고 썼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위치한 육신사(六臣祠). 조선 세조 때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내에는 태고정(太古亭), 도곡재(陶谷齋), 삼가헌(三可軒) 등 순천 박씨와 관련한 재실 등이 들어서 있다. 달성군 제공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위치한 육신사(六臣祠). 조선 세조 때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경내에는 태고정(太古亭), 도곡재(陶谷齋), 삼가헌(三可軒) 등 순천 박씨와 관련한 재실 등이 들어서 있다. 달성군 제공
조선 선조 때 낙포 이종문(李宗文)이 지은 정자인 하목정(霞鶩亭). 그의 장자 이지영이 인조로부터
조선 선조 때 낙포 이종문(李宗文)이 지은 정자인 하목정(霞鶩亭). 그의 장자 이지영이 인조로부터 '霞鶩亭'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달성군 제공

하빈면은 달성군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성주'고령'칠곡군과 경계를 이루고, 다사읍과 이웃한다. 면 소재지는 현내리다. 면 가운데를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하빈천이 있다. 하빈천을 중심으로 하산(霞山)들'대평(大坪)들과 같은 좁고 긴 소규모 곡조평야가 발달했다. 면의 북동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한다.

신라시대 다사지현(多斯只縣)에서 대구부 하빈현(河濱縣)이 됐다. 조선시대 하빈면 북쪽의 9개 동을 아우르면서 대구부 하북면(河北面)으로 불렀다. 1914년 8개 동을 병합해 하빈면이라 했고, 이어 감문'동곡 등 9개 동으로 재편됐다.

현재 하산리(霞山里), 묘리(竗里), 기곡리(基谷里), 대평리(大坪里), 무등리(武等里), 현내리(縣內里), 감문리(甘文里), 동곡리(桐谷里), 봉촌리(鳳村里) 등 9개의 법정리와 19개의 행정리가 있다.

◆사육신 박팽년의 묘골 이야기

하빈 동곡삼거리에서 오른쪽 왜관 가는 길 907번 지방도를 따라 3.5㎞쯤 가면 묘골마을이 나온다. 동쪽은 기곡과 대평리, 남쪽은 감문, 서쪽은 하산리로 통한다. 마을 주변의 산은 병풍처럼 낮고 마을 지형이 묘하게 생겼다 해서 '묘골'(妙谷)이다.

묘골은 사육신 가운데 한 명인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유일한 혈육인 둘째 아들 박순의 아들 일산이 성종 10년(1479)에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그는 묘골 박씨(순천 박씨)의 시조다.

마을에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에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육신사(六臣祠)를 만나게 된다.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본래 박팽년만이 향사되어 오다 박팽년의 현손인 계창공이 기일 날 여섯 신하가 함께 사당 문밖에서 서성이는 꿈을 꾼다. 현손은 이에 놀라 나머지 다섯 신하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됐다.

단종 복위에 실패한 박팽년은 세조로부터 국문을 당하게 된다. 직접 국문장에 나선 세조는 박팽년에게 조용히 다가가 "네가 마음을 바꿔 나를 섬긴다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며 구슬렸다. 이 말을 들은 박팽년은 아무 말 없이 웃고는 그저 '나으리'라고 부를 뿐이었다.

더욱 약이 오른 세조가 "네가 일전에 이미 신하라고 말한 바 있으니 지금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자 "저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어찌 나으리(세조)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1년 동안 장계와 문서에 스스로 신하라고 일컬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세조는 그가 올린 장계를 확인해 보았다. 신하 신(臣)자 대신 거인 거(巨)자가 씌어 있었다. '신하' 신, 박팽년이 아니라 '거인' 거, 박팽년이었다. 원래 장계의 '臣' 자는 신하를 낮추어 불러 작게 쓰는 법이다. 박팽년은 국록도 성삼문처럼 창고에 고스란히 쌓아두었다.

금부도사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를 보고 말했다. "고집을 잠깐 거두시오면 온 집안이 영화를 누리실 텐데. 무슨 고집을 그렇게도 부리십니까?" 박팽년은 "더럽게 사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나으니라"는 말을 남기고 생의 종지부를 찍는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박팽년은 세조의 청을 이 '단심가' 한 수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노비의 아들로서 대를 잇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 박팽년의 생각이었다. 결국 굴복하지 않는 사육신의 충절을 본 세조 또한 이들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이다"고 말했다.

세조를 거부했던 박팽년(병조참판)은 이조판서인 아버지 박중림, 다른 4형제, 아들인 헌, 순, 분 등과 함께 처형됐다. 부인과 제수, 자부들은 모두 관비로 내쳐졌다.

박팽년이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둘 때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인 성주 이씨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친정인 대구로 간 이 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했다. 마침 박팽년의 여종 또한 그 무렵 임신을 했다. 이 여종이 이 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을 낳는다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씨가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다. 마침 여종은 딸을 낳았고 이 씨 부인의 아들과 맞바꾸고는 이름을 박비(朴婢)라 짓고 길렀다. 박비가 장성한 뒤에 경상감사로 온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을 만나게 되었다. 박비를 본 이극균은 눈물을 흘리며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자수를 권했다.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비에서 일산(壹珊)으로 고치게 했다.

또 성종은 노비의 신분을 풀어준 것은 물론 박일산에게 사복시정(정3품 당하관)이란 벼슬까지 내려주었다.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은 묘골 순천 박씨 충정공파 입향조(入鄕祖)가 된 셈이다. 일산은 뒤에 후손이 없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아흔아홉 칸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하게 됐다.

박팽년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뒤 복관(復官)된 것은 숙종 대인 1691년(숙종 17)에 와서다.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인조가 내린 당호 하목정(霞鶩亭)

'묘박하이'(妙朴霞李).

묘골에 박씨가 있다면 하산에는 이씨가 있다. 묘골의 순천 박씨와 하산의 전의 이씨를 일컫는 말이다.

묘골에서 이어진 낙동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다시 동으로 비틀어 내려가다 보면 약 2㎞ 지점에 400년의 자태를 오롯이 품은 소담한 정자 하나가 나온다.

하목정 주변 강가엔 석벽이 위엄을 과시라도 하듯 병풍처럼 솟아있고, 명사십리라 할 만큼 널따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해 질 녘 노을이 내려앉은 강변에 창공을 날아가는 철새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하목정은 조선 선조 37년(1604년) 전의 이씨인 낙포 이종문(李宗文)이 지은 정자다. 그의 장자 이지영이 인조의 명을 받아 부연(附椽'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로 사대부 집의 와가에서 사용)을 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조선 인조가 왕손인 능양군 시절에 이곳 하목정을 지나다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이 집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됐다. 그 후 인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고 이종문의 아들 지영(之英)이 경연관으로 궐에 들게 된다.

인조는 지영을 선뜻 알아보고 옛일을 회상하면서 묻는다. "너의 집 하목정은 주변 풍광이 가히 절색으로 부연을 달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 지영은 "사서(私庶)의 사실(私室)에는 감히 부연을 달 수가 없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 같은 강산경치가 좋은 정자는 사가(私家)와는 다르니 마땅히 지붕을 고치고 부연을 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고 하면서 내탕금으로 은 200냥을 하사했다.

이어 지영이 이르기를 "하명대로 부연을 달겠사오나 앞으로는 출입을 금하고 사사로이 거처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 인조는 "그렇다고 거처하는 것은 폐하지 말고 내가 유숙했다는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친히 '霞鶩亭'(하목정)이라는 당호까지 하사했다.

◆사대부들의 교류 공간으로 유명해져

이후 인조 임금이 하목정을 위해 수백 냥에 이르는 내탕금과 당호까지 하사한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가면서 당대 사대부들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한다.

하목정을 소재로 한 시 18수가 전해지고 있다. 이 중 10수는 이종문 일가의 문집인 '전성세고'(全城世稿) 가운데 낙포집(洛浦集)에 수록돼 있고, 또 후손인 이익필이 하목정의 절경을 시(하목당 16경)로 읊었다. 현재 14수의 시 판각이 하목정 대청마루에 걸려 있다.

하목정을 지은 이종문의 조부가 경기도 부평에서 처음 하빈 하산리에 입향, 정착했다. 이후 자손들이 번성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여러 곳에서 집성촌을 이뤄 뿌리를 내렸다. 전의 이씨 일가는 달성 하빈면과 다사면, 고령의 다산면 일대에서 문무 벼슬이 줄을 이었다.

이종문은 임진왜란 당시 생원으로서 낙재 서사원과 모당 손처눌 등과 함께 팔공산을 근거로 의병을 모집해 왜적과 싸웠다. 정유재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켜 원종공신으로 녹훈되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됐다. 이후 그는 말년 때인 1604년에 하목정을 짓고 여생을 보낸다.

이종문의 두 아들 가운데 첫째 수월당 지영은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균관 전적, 직강, 예조좌랑 등을 거쳐 광해군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호조좌랑이 되기도 한다. 인조반정 이후 북청절도판관과 울진현령을 5년간 맡기도 했다.

미수 허목은 수월당의 묘갈명에 "수월당은 광해군 시절에 어두운 시국을 박차고 일어나 하목정에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평생 동안 명예와 권세를 피하며 구차한 벼슬살이를 기뻐하지 않았다.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벼슬을 버리고 떠났고, 이로 인해 낙오되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예를 드날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품행은 더욱 완전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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