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를 좋아하고 존경했던 구정(龜亭) 남재(南在'1351~1419)는 목은 이색의 제자로 길재와 각별한 사이였다. 길재보다 나이는 두 살 많지만, 충절을 지키는 길재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남재의 원래 이름은 겸(謙)이었으며 그의 동생은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남은(南誾)이었다. 그 역시 조선 개국에 참여했으나 조선 개국 후 포상을 받기 싫었는지 숨어 버렸다. 태조 이성계가 사람을 놓아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를 찾게 되자 그에게 '거기 있었다'는 의미로 재(在)라는 이름을 새로 내리고 개국 일등공신에 봉했다.
그의 아우 남은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이방원은 남재를 신임했고 임금이 된 후 벼슬 직위를 높여가며 나중에 그를 우의정, 영의정에 임명하는 등 중용했다.
남재는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오면서 길재에게 그의 충절을 기리는 시 세 수를 지어 보냈다. 남재의 시에 많은 명사가 화답해 길재의 효행과 절개를 칭송하는 시를 지으니 수백 수에 달했다. 그중에서 길재의 스승 권근과 변계량의 시가 문장이 돋보였다. 특히 권근은 남재와 여러 명사의 시에 서문을 따로 쓰면서 제자인 길재를 '선생'으로 일컬으며 그의 깊은 효심과 단단한 절의, 불교 법식을 따르지 않고 여묘살이를 하는 등 성리학의 장례 절차를 철저히 지킨 점 등에 최대한 경의를 담아 높이 평가했다.
남재는 길재에게 가묘를 지어 드리고 좀 더 나은 거처도 마련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길재의 생활은 더욱 안정되어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남재가 길재에게 좋은 술 한 병을 보내자 길재가 기뻐하며 고마움을 담은 시를 전하는 등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정도 두터웠다. 길재는 청빈한 생활 속에서도 술과 차 마시는 것을 좋아했고 때때로 거문고를 연주하며 풍류를 즐겼다.
길재의 이름은 사실 지금처럼 크게 빛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낙향할 때 벼슬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숨어 살듯이 지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보다 더 높은 벼슬을 지냈던 관료 중에도 '불사이군'의 길을 갔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향 이후 길재의 충절과 효행이 한결같았고 높은 학식과 덕망이 차츰 알려져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권근, 남재 등 그와 인연을 맺었던 많은 동시대인이 길재를 칭송하면서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명성이 높아져만 갔다.
결정적으로 그를 존경했던 이방원이 그에게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돌아온 일이 전해지면서 그는 조정은 물론 백성 사이에서도 훌륭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고려 말에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죽고 길재는 살아남아 이를 비교하기도 하지만 조선 조정의 벼슬을 거부한 일은 반역에 해당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어서 길재의 절의는 정몽주가 죽음으로 지킨 절의와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세종대왕은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존경했던 길재를 청백리로 선정했고 길재의 차남 길사순은 그 음덕에 힘입어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길재의 아우이며 승려였던 길구도 형의 충절을 기렸고 형에게 감화받아 선비로 돌아와 생원시에 급제했다. 길구뿐만 아니라 많은 승려가 길재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환속해 선비의 길을 갔다.
길재 사후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영남 사림파는 재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다 조선 중기 이후 조정에 진출, 훈구파와 대립했지만, 사림파와 훈구파 할 것 없이 길재를 칭송했다. 조선 중기 이후 사색당파로 나뉘어 극심한 정쟁이 벌어지지만, 이때에도 조정 관료들은 자신이 속한 파벌에 관계없이 길재를 칭송하고 기렸다.
길재의 충절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왕들의 의도에 부합하고 신하 된 도리를 알리는 표상이었기 때문에 길재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통치 이념에 들어맞는 모범적인 인물이었다. 삼강에 충실한 그의 효행과 바른 삶도 사회의 도덕 윤리와 질서를 지켜나가는 나침반과 같았다. 즉, 그는 고려의 신하이고자 했으나 조선 관료의 모범이 되었고 조촐하지만 위대한 삶을 통해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 됨으로써 조선 사회에 한줄기 큰 빛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길재가 세상을 하직한 이후 그를 기리는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길재의 사후 7년 뒤인 1426년(세종 8년)에 김성원이 길재를 좌사간대부에 추증할 것을 청해 받아들여졌다. 김성원은 길재의 굳센 절개를 작위를 높여 빛내 세상에 알리자고 임금에게 청했다.
김성원은 1480년(성종 12년) 수찬관으로서 임금의 명을 받아 길재에 대한 기록이 있는 '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길재의 후학인 조광조와 함께 혁신정치에 동조한 김구의 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목은 이색의 후손인 이자(1480~1533) 라는 인물은 기묘사화 때 음성군에 유배되었을 때 거처 근처에 초은정(招隱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포은, 목은, 야은 등을 모신다, 초대한다'는 의미로 길재 등을 존경했음을 알 수 있다. 이자는 중종 초기 기호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연경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연경의 사위인 노수신(1515~1590)은 나중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길재를 조선 최고의 선비로 꼽았다. 노수신은 이언적, 이황 등과 학문적 교류를 가졌던 대학자이며 훈구파를 몰아냈던 박순 등과 함께 길재를 높이 떠받들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도학의 깊이에서나, 정치에서나 당대를 이끌던 대단한 인물들로 사림 출신이거나 사림과 관계를 맺으면서 길재를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길재의 학문 계보를 잇는 김굉필의 제자 유희춘(1513~1577)은 길재를 가리켜 특히 효를 중시하고 이를 예법에 맞게 지킴에 어김이 없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장생의 문인이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꼽히는 유계 역시 길재를 예에 밝고 효도에 극진하며 학자로서 위대하고 스승으로서 자상하다고 극찬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도 길재를 흠모해 그의 효행과 충절에 대한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장현광은 구미 인동 출신으로 길재가 동향의 선조였기 때문에 더더욱 길재를 칭송하고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받는 이황 역시 길재의 절개에 대한 시를 남겨 그를 기렸다. 이황은 길재와 학문적으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고 길재처럼 관리로 살기보다는 산골에 은거하여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살고자 했고 그렇게 했다. 이황은 이언적의 제자이고 이언적은 손중돈의 제자이고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이니 길재의 학문적 계보에 있는 김종직을 통해 맥이 닿아 있다.
조선 중기 이후 남인의 영수로 떠올랐던 미수 허목(1595~1682)은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지만, 두 사람 모두 학문이 깊은 대학자로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길재를 숭상하고 기리는 데 하나같이 열성적이었다. 허목은 한편으로 길재처럼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을 찬양했는데 그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 장현광이었으며 장현광은 길재를 빼닮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길재의 스승이었던 권근의 후손 권필(1569~1612)도 길재의 절의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김덕령 장군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시를 쓰고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개탄하는 시를 쓴 후 모진 형벌을 받고 죽었다.
장현광은 길재의 효행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내렸다. 장현광은 "선생의 충의는 실상 효우의 도에서 근본하였다"고 함으로써 길재 충절의 근본이 바로 효절이었음을 강조했다. 이는 이황이 모든 선함의 근본을 효에 두었던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현광은 길재의 가르침이 효에 대한 가르침이며 길재에 의해 풍속이 순화되었다고 평가했다. 풍속이 순화되었다는 것은 충효열(忠孝烈)의 삼강이 바로잡혔다는 것으로 길재가 바로 조선 삼강의 근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길재와 그의 제자들이 중시한 '소학'이 예학의 근본을 담고 있으며 소학은 효를 근간으로 삼아 충효열의 삼강을 바로 세우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데 길재가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찬미하며 단순하고 청빈하게 살다 간 길재의 삶도 조선 선비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친과 숙부가 기묘사화로 각각 파직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관직에 대한 꿈을 접고 산림처사로 살아간 남명 조식은 길재와 닮은 삶을 살았으며 길재의 인생관을 본받아 '어부가'와 '효빈가' 등을 지은 농암 이현보, '도산십이곡'을 지은 퇴계 이황, '고산구곡가'를 지은 율곡 이이 등 많은 관료, 학자,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살고자 했다.
조선 조정 역시 길재를 기려 영조 15년(1739년)에 충절공의 시호를 제수했으며 정조는 길재의 뛰어난 학문과 문장을 높이 사 1799년에 문절공의 시호를 내렸다.
도움말: 길화수 (사)금오서원보존회 부이사장(야은 길재 17대 종가손)
이택용 경북정체성포럼 선비분과위원(고전문학 연구가)
김석배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박인호 금오공대 교양교직과정부 교수
참고 자료:야은 길재의 학문과 사상(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소 발간)
조선 선비의 길을 열고 숲을 이루다(한상우 한국교원대 교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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