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덕 원전 주민투표 후유증…환경단체 vs 한수원 대리전 양상

더 깊게 파인 갈등의 골, 스스로 해결 가능할까

지난주 영덕은 원전투표를 둘러싼 투표율 전쟁이 벌어졌다. 투표 불참을 독려하는 애드벌룬과 안내장을 나눠주는 한수원 직원, 그리고 지난 12일 영덕군 한 투표소에 주민들이 줄지어 투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지난주 영덕은 원전투표를 둘러싼 투표율 전쟁이 벌어졌다. 투표 불참을 독려하는 애드벌룬과 안내장을 나눠주는 한수원 직원, 그리고 지난 12일 영덕군 한 투표소에 주민들이 줄지어 투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한 달여 간의 '전투'가 끝났다."

지난 6'4 지방선거만큼이나 격렬했던 영덕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두고 주민들은 이렇게 부른다. 실랑이 끝에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사례도 적지 않았기에 주민들은 폭력사태 없이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다. 갈가리 찢긴 영덕을 들여다봤다.

◆대리전 양상

투표 이후에도 원전 찬반 주민들 간 반목의 골은 더 깊어지게 생겼다. 원전 찬반 투표의 불법'탈법 시비가 고발사태로 이어진 데다 원전을 반대하는 환경단체'군민과 원전을 추진하는 한수원 후원 단체들 간의 반목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원전 반대집회에 예상외로 주민들이 적게 참석하자, 지난달 26일을 전후해 찬성 현수막이 영덕을 뒤덮기 시작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관련 단체'건설사 등을 총동원해 현수막을 내걸고 주민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달 1일 원전 반대 측의 설문조사 결과 주민투표에 참여하겠다는 답변이 71.9%가 나오자, 투표 찬성 측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 화들짝 놀란 정부'경상북도 역시 "이번 원전 찬반 투표는 아무런 법적인 근거나 효력이 없다"며 투표를 막아섰다.

이에 원전 반대 측은 법률가들의 해석을 인용하며 "법적 근거'효력이 없을 뿐 불법투표는 아니다"며 지난 5일 검찰에 찬성단체들을 '허위사실 유포'로 고발하며 강경 대응했다.

문제는 원전 찬반 투표에서 원전 반대 측은 전국의 환경단체 회원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해 측면 지원했고, 원전 찬성 측은 산업통상자원부'한수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주민들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는 점이다. 찬반 주민들이 앞으로 갈등의 골을 메우는 것이 자신들의 뜻만으로 될지 의문스럽다.

투표율 부풀리기 시비에서도 대리전 양상이다.

원전 찬성단체 측은 11, 12일 투표가 진행된 이틀 연속 투표율 부풀리기 의혹을 제기하고 투표가 끝난 다음 날 "중복투표 증거가 있다"며 공정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원전 반대 측은 "허위사실 유포로 고발할 것"이라고 즉각 맞섰다. 찬성단체들은 이번 투표에서 "한 사람이 투표소별로 옷을 갈아입어 가며 부정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투표자 수를 부풀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제대로 된 증거는 공개하지 못했다.

투표 다음 날 원전찬반투표추진위원회와 투표관리위원회는 "정부'한수원 등의 온갖 방해에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의사를 표현했는데 아니면 말고 식으로 주민투표 자체를 흠집 내고 있다"며 "중복투표 주장은 전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발끈했다. 이들은 "일일이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하는 작업을 거쳤다. 얼굴을 두 개 가지고 다니지 않고는 중복투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투표 불참은 물품 공세 탓?

이번 투표에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 하나는 사전 주민투표 참여 서명에 참여했던 주민 중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불참 이유이다. 정부와 한수원의 조직적인 투표 방해 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원전찬반투표추진위원회의 사전 참여 서명을 통해 확정된 투표인명부 인원은 1만2천8명이었고, 현장 등록 후 투표한 6천573명까지 더하면 총 투표인명부는 1만8천581명이었다. 이 중 1만1천209명이 투표했으니 당초 투표인 명부에 오른 7천372명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 원전 반대단체의 주축은 현재 농민단체들이다. 고령인구가 많은 영덕군에서 상당수 농촌 노인이 서명을 해놓고도 막상 투표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셈이다.

투표관리위원으로 참가했던 한 영덕군 농민 A(60) 씨는 "할머니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쌀 받고 버스 타고 목욕도 갔다 왔는데 투표하러 가면 혹시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니냐고 문의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한수원을 비난했다.

영덕군 9개 읍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영덕읍이 이번 원전 찬반 투표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았다. 투표관리위원회는 투표율이 높은 곳에 불이익이 돌아갈 것을 우려해 읍면별 통계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전찬성단체들이 자체 추산으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영덕읍은 유권자 대비 20% 초반 정도가 이번 투표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읍내 투표율이 유권자 대비 30% 선이 됐다면 전체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5%포인트 이상 더 올랐을 것으로 보는 것이 주민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영덕군 영덕읍 상인 B(56)씨는 "읍내에는 공무원'회사원'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산다. 농어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과는 달리 주변을 많이 의식하게 된다. 특히 상인들의 경우 찬반 운동이 불붙을 때 한수원 직원들이 읍내에 많이 상주했는데 그들이 하루 쓰는 돈이 수천만원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 사람들에게 찍히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하는 것도 사실이다"고 했다.

또 다른 군민 C(54) 씨는 "한수원 직원은 물론이고 당원이나 공무원들이 투표소 근처에서 눈에 띄는데 마음 놓고 투표하러 갈 수 없는 것이 영덕의 현실이다. 그들은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동향 파악하는 정도라고 하더라도 익명성이 없는 영덕에서는 엄청난 압박이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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