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영란법 후폭풍, 관공서 상권 찬바람

공무원 향응 몸사리기 현실로… 식당가·술집 매출 부진 아우성

지난주 사업 때문에 대구시청에 들렀다가 담당 공무원과 식사를 하게 된 사업가 K(54) 씨는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공무원과 회의를 마치고 늦은 저녁 식당에 들렀는데, 국밥 한 그릇으로 끼니를 급히 때웠기 때문이다. K씨는 "고향 후배이고 친분도 두터워 고기도 좀 굽고 반주도 한잔 할 생각이었는데 극구 사양했다. 청렴도 좋지만 선후배 정마저 법으로 가로막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 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유통가를 넘어 부동산 시장에도 찬물을 끼얹고 있다.

내년 9월 시행을 앞두고 벌써부터 공무원 등 해당 직군 종사자들이 몸 사리기에 돌입하면서 관공서 주변 음식점이 매출 부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9월 공무원이 직무 관련 금품 또는 향응을 제공받을 경우 예외 없이 파면이나 해임 등의 중징계를 받도록 해 관공서 인근 식당가와 술집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상인들은 상가 매출이 예전만 못하다고 아우성이다. 지난 8월 불거진 메르스 여파가 완전히 가시고 나니 이번에는 공무원 행동강령과 김영란법이란 복병을 만났다고 하소연했다.

대구 한 구청 근처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김모 씨는 최근 메뉴에 7천원짜리 갈비탕을 추가했다. 점심시간 공무원들이 고기를 굽는 대신 값싼 국밥이나 갈비탕만 찾기 때문이다. 김 씨는 "하다못해 단가가 높은 돼지고기라도 시켜야 남는 게 있는데, 국밥만 팔아서는 월세 내기도 힘들다"며 "김영란법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영세 자영업자마저 생계를 위협받는 지경이 됐다"고 했다.

상가 매출 부진은 결국 주변 상권 위축과 부동산 침체로 이어진다. 상가의 경우 업종과 임대료 상관관계가 큰 데다 한 번 상권이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급 음식점이 사라지고 저가의 국밥집 등만 생기면 출혈경쟁은 물론 임대료 하락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

한 공인중개사는 "시청'구청 등 관공서 주변은 공실률이 적고 안정적 매출이 가능해 임대료가 비교적 높은 편"이라며 "하지만 기본적인 식사 접대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장기적으로 이들 주변 상권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백화점 등 유통가에선 김영란법 후폭풍이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추석엔 김영란법이 한가위 풍속마저 바꿨다. 기존의 고가 선물세트 대신 부담없이 선물할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이나 햄'참치 등 가공식품으로 선물 구성이 옮겨갔다. 시행령대로라면 앞으로 5만~7만원대 이상을 선물할 경우 모두 현행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지역 유통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추석에 판매된 선물세트 중 5만원 이하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12~13% 미만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5만원 이하 선물 제품의 비중이 20%를 넘었다. 그나마 5만원 이하 품목 중에는 신선식품보다 대기업이 판매하는 참치'햄세트와 샴푸 등 가공식품과 생필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유통 전문가들은 "김영란법의 본격 시행은 내년 9월 28일부터지만 이미 한우'굴비 등 대표적인 고가 상품의 판매에 영향을 받고 있다"며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는 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규제의 화살이 엉뚱하게 유통가에 돌아오고 있다"고 전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