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현자' '진정한 정치인'으로 존경
열정·책임윤리·균형감각 평생 동안 체현
'국가정치인' 만든 원동력은 책임의식
우리 정치인에겐 좀처럼 안 보이는 덕성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흡사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끊어질 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담배 연기는 깊은 고뇌의 흔적처럼 여겨지고, 담배를 빨 때마다 중단되는 말은 그만큼 더 간결하고 강렬해진다. 그는 결코 극적이거나 과장된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담배는 그의 말과 행위를 하나의 드라마로 만드는 연극적 소품이었다. 금연을 철저하게 시행하는 나라에서 국민들은 TV 토론이나 인터뷰에서도 항상 담배를 입에 문 그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기꺼이 허용할 뿐만 아니라 연기와 함께 뿜어내는 그의 말 하나하나를 경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모범국가인 독일의 정치 무대에서 훌륭한 연기로 칭송을 받은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의 모습이다.
독일인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가 96세의 나이로 11월 10일 함부르크 자택에서 타계했다. 그는 또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내가 2008년 독일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헬무트 슈미트는 90세 생일을 맞이했었다. 한 해 내내 그의 생일을 기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문에는 그에 관한 기사로 가득했고, 방송은 연이어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당신에게 그 정도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용인할 수 있습니다'라는 생일 기념 광고 카피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해도, 언제 어느 곳에서나 슈미트에 관한 칭송과 존경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왜 독일 국민들은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슈미트를 '최고의 현자' '진정한 정치인' 또는 '위대한 유럽인'으로 존경하는 것일까? 왜 우리에겐 이런 정치인이 없는 것일까? 그에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1962년 함부르크가 범람했을 때 보여준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일 수도 있고, 적군파 테러리스트에 가차 없이 대처하는 정치적 용기일 수도 있고,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인질 86명을 구출한 결단력일 수도 있다. 어쩌면 1982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33년 동안 약 서른 권의 책을 쓴 열정적인 지성일 수도 있고, 현실 정치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 282편의 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과 행위로 보여준 탁월성은 바로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막스 베버가 직업 정치인에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세 가지 덕성, 즉 '열정' '책임윤리', 그리고 '균형감각'을 평생 동안 체현하였다. 슈미트는 냉철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정치에는 감정과 열정의 자리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이성에 대한 열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소 아우렐리우스, 칸트, 베버를 즐겨 읽었기 때문일까. 그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예단하는 대신 현실의 조건 속에서 올바른 것을 찾는 실용주의적 정치인이었다.
그는 역사에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정치인들을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어떤 길이 올바른 길인지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대개 독재자의 길을 걷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올바른 것에 관해 단지 논의만 하는 것보다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이 낫다." 국민을 위해 정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국민을 들먹이지 않는다. 국민의 밥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민생을 부르짖지 않는가? 국민에 대한 책임의식이 그를 진정한 '국가정치인'으로 만든 것이다.
끝으로, 슈미트는 도덕적 정치인이기는 하지만 결코 독선적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정치적 노선에 관해 회의한 적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명쾌하게 대답한다. "오직 멍청한 사람들만이 회의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소통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정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슈미트에 의하면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 이처럼 슈미트를 위대한 정치인으로 만든 것은 이성에 대한 열정, 국민에 대한 책임의식, 그리고 균형 있는 타협정신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세 가지 덕성이 우리 정치인들에게선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슈미트에 대한 오마주로 담배를 피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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