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짜리 애가 곡괭이질(할머니 역)을 어찌 저리 잘하노." 리허설 현장에서 들린 스태프의 칭찬은 한 배우를 극의 주연으로 눌러 앉혀버렸다. 연극 '오구'에서 '노모(老母) 남미정'은 그렇게 탄생했다.
스타들의 출세 배경엔 운명 같은 배역이 있다. 조연에 머무르던 설경구가 스타 배우 반열에 오른 건 영화 '박하사탕' 덕이었고, 탤런트 최불암이 국민배우로 성장한 건 드라마 '수사반장' '전원일기' 공이 크다.
당시 20대 초반 신인배우 남미정(47)에게 '오구'의 노모 역은 큰 부담이었다. 당장 50년 시차를 뛰어넘어야 하는 부담은 분장으로 극복한다 쳐도 임종을 앞둔 노인의 인생 연기는 분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극은 무대 위로 올려졌고 남 씨의 능청스러운 연기 덕인지 흥행을 거듭했다. 그 덕분에 배우로서 남미정의 삶은 순탄했다. 이제까지 모두 50여 편의 연극, 뮤지컬, 영화에 출연했고 2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2011년 남 씨는 돌연 대구행을 결심했다. 무대 역할도 바뀌었다. 이번엔 연출자였다. 작년 '비 내리는 고모령'을 올렸고 얼마 전 연출한 뮤지컬 '처음이자 마지막'이 막을 내렸다.
올 12월 남 씨는 새 뮤지컬 '미스코리아'를 무대에 올린다. '비 내리는 고모령'에 이은 향토 뮤지컬 2탄이다. 다양한 이벤트들이 준비되어 있고 출연진도 역대 최강급이다. 제목에 걸맞게 전 현 미스코리아 3, 4명을 캐스팅했으며 엄청난(?) 카메오들이 지금 대본 연습을 하고 있다.
새 뮤지컬 연출에 바쁜 남 씨를 수성아트피아 연습실에서 만나보았다.
◆대구서 4년째 머물며 뮤지컬'연극 연출
군위군 소보면 복성리 679번지. 남 씨는 지금도 본적 주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 대구경북에 모태(母胎)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배타적 도시 분위기 탓에 대구행을 결정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돌아오게 된 계기를 첫 질문으로 던졌다.
"군위에서 잠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이때 기억이 원형질처럼 남아 있어요. 대구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별 망설임 없이 선뜻 나서게 된 데에는 이런 뿌리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남 씨의 대구행은 개인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배우에서 연출가로 본격 변신에 나섰다는 점이다.(물론 서울에서 조연출을 거치며 20편 이상의 작품 제작에 참여했다.) 둘째는 그의 멘토이자 스승인 이윤택 씨에게서 나와 독립하는 의미가 있다. 20년 이상 고락을 함께했기에 그녀의 분가(分家)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지금 대구에서 4년째 둥지를 틀고 자신만의 컬러를 채색하고 있는 중이다. 대구에서 남 씨는 거의 매년 연극, 뮤지컬을 한 편씩 연출했다. '엄마들의 수다' '비 내리는 고모령' 같은 작품들이 그녀의 손끝을 거쳐 무대 위에 올려졌다. 남 씨가 대구를 주목한 이유는 또 있다. 든든한 문화적 펀더멘털과 무한한 시장성이었다. "서울 제작자들이 뮤지컬을 띄울 때 대구의 반응을 가장 주목할 정도로 대구는 뮤지컬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곳입니다. 문예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시민들의 문화적 관심, 소비 욕구가 무척 높은 편이죠."
◆'오구' 역 맡으며 국민배우로 성장
1989년 초연된 후 800여 회 공연에서 300만 명 관객을 불러모았다는 '오구'. 처음엔 마당극 형식의 소규모로 시작한 탓에 출발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극에 죽음을 끌어들이고 무대에서 굿판을 벌인다는 거부감 때문에 많은 이탈자가 생겼다. 문화계에서는 연일 찬반 논쟁이 들끓었다. 이런 '노이즈 마케팅'이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더 흥행을 도왔다. 여기에 이윤택 씨의 탁월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 열정이 결합되면서 작품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한창때는 관객들이 극장을 칭칭 감을 정도였어요. 객석, 계단, 통로는 물론 스태프실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초기 '오구'는 관객들과 호흡을 중시했기 때문에 극 중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웃음의 해일이 일 정도였죠."
25년 동안 '오구'를 거쳐간 배우들의 면면도 무척 흥미롭다. '1천만 관객의 보증수표'로 통하는 오달수 씨가 문상객 1번으로 데뷔했고 요즘 활약이 돋보이는 곽도원, 윤제문 씨도 오구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1997년도에 강부자 씨가 노모 역으로 합류하면서 연극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는다. 국민배우급 탤런트가 극에 투입 되자 극의 개성화, 차별화도 분명해졌다. 강부자 씨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감동적 연기를 펼쳤다면 남 씨는 관객과 소통에 치중하며 코믹코드로 극을 이끌어갔다.
◆향토 뮤지컬 '미스코리아' 연출 분주
20대 초반에 연출자의 호통소리를 들으며 무대에 올랐던 남 씨. 그때부터 '오구'는 남 씨의 삶 일부가 되었다. "이 한편에 제20대의 순수한 감성과 30, 40대의 무대 열정이 모두 녹아 있어요. 저의 공부와 사랑, 시련과 늙어감의 모든 과정이 이 연극과 함께 흘러갔던 거죠."
열심히 산 만큼 상복도 따랐다. 2004년에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받았고 2006년 서울연극제에서는 연출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제 그녀는 서울 무대에서의 화려한 이력을 뒷전으로 물리고 이제 대구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올 12월 17일 뮤지컬 '미스코리아'를 무대에 올린다. 캐스팅, 대본 등 모든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 산업화 시대 부모님들의 애환을 다뤘다면 이 작품은 오늘을 사는 40대 여성들의 꿈과 수다와 추억을 다루었다.
문화계에서는 이 작품을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배우로서 명성을 쌓아왔던 남 씨가 지역에서 연출가로서 본격적으로 꿈을 펼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20년을 무대 위에서 놀았으니 이제 무대 아래서도 한판 벌여 보려고 합니다. '오구'나 '미스코리아'가 어차피 하나이고 우리 삶 또한 한편의 연극일 뿐입니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둬 미스코리아 금관이 그녀의 머리에도 화관(花冠)으로 얹혀지길 기대한다.
◆남미정은=1969년 군위군 소보면에서 태어나 부산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서울에서 작품 활동 중 중앙대 대학원에 진학, 연극학을 전공했다. 1988년에 연희단거리패에 입단해 2011년까지 23년간 몸담았다. 그동안 '오구' '햄릿' '어머니' 등 40여 편의 연극, 뮤지컬에 출연했고, '천국과 지옥' '비 내리는 고모령' 등 3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20대 초반에 운명처럼 '오구'로 인연...이젠 둘 다 연출가로 '동행'
남미정 씨가 연극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0년대 부산 가마골소극장 시절. 당시 이윤택(63'작가'연극연출가) 씨는 연희단거리패를 운영하며 연극 모임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 부친상에 다녀온 이윤택은 상중(喪中)에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오구'를 써내려갔다. 이틀 밤낮을 원고 작업에 매달린 끝에 대본이 완성됐다.
오구란 오구굿의 준말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서둘러 제작에 들어가고 문상객에 오달수(당시 무명), 노모 역에 남 씨가 발탁됐다. 파격적인 캐스팅 같지만 당시 인력 구조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상 막이 오르자 장내는 연일 웃음바다가 되었고 관객들이 밀려들었다. 한편으로 문화계의 거센 비판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굿이 어떻게 연극판에 올라갈 수 있느냐'는 조롱과 '죽음을 너무 희화화했다'는 비난이 줄을 이었다. 이윤택은 외풍에 굽히지 않고 굿판을 이어갔다.
7, 8년차에 잠시 주춤하던 흥행은 IMF 시절 기적처럼 흥행을 이어갔다. 웃음 코드가 당시 우울한 사회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구가 초연된 지 25년. 그때 주역인 두 사제(師弟)는 이제 지역을 달리해 연출가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각자 사는 공간은 다르지만 삶과 연극, 인생과 굿의 경계를 여전히 혼동하는 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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