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밖에서 보면 참모습 보일 텐데…

여산 속에 있기 때문

소식(蘇軾)

이리 보면 고갯마루 저리 보면 산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고 제각각 다 다르네

여산(廬山)의 참모습을 알 수가 없는 것은

다만 이 내 몸이 여산 속에 있기 때문!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원제:[題西林壁(제서림벽: 서림사의 벽에 쓰다)]. *서림사: 중국 여산에 있는 절.

특정 사물의 모습은 바라보는 방향과 위치에 따라서 죄다 달라지기 마련이다. 중국의 거대 명산 중의 하나인 여산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보는 방향과 위치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그 모습이 달라진다. 따라서 내가 있는 곳에서 바라본 여산이 여산의 참모습일 수는 없다.

여산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산 속에서 여산을 바라보려 하지 말고 여산 밖으로 걸어 나와서 멀리서 여산을 바라봐야 한다. 지구 속에서는 지구가 둥근 것을 잘 알 수 없지만, 지구의 밖으로 나와서 보면 지구가 둥근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듯이, 여산 밖에서 여산을 바라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여산의 참모습을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본 여산의 모습이 여산의 참모습이라고 막무가내 우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비단 가시적인 사물들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바라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몇 발자국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이 순도 100%의 절대적인 선이라고 집요하게 우긴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전쟁이 그래서 일어나고, 폭력 시위와 과잉 진압을 둘러싼 여야 간의 양보 없는 시비도 그 때문에 생긴다. 요컨대 흑과 백 사이 사생결단식의 극단적인 대립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박덕규 시인의 시 '사이'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사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중간이 아니라 흑백의 양극단을 넘어서서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한 지점을 가리킨다. 아주 범박하게 표현한다면 중도(中道)나 중용(中庸)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중용의 덕을 제대로 갖춘 중도가 많아져야 사회 전체의 좌우 균형이 흔들리지 않는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그 중도가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왜 그러냐고? 중도에 서는 순간 양다리를 걸친 회색분자로 낙인이 찍혀서, 흑과 백의 양편에서 돌멩이가 동시에 날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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