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미화 칼럼] 거산의 민주화와 대구경북

민주화 외길 YS 지역과는 애증 관계

군대 사조직 하나회 해체 전광석화

20년 전 OECD 가입 지나치게 빨라

대한민국 현대사를 군정 혹은 군정의 연속에서 민주화로 대전환시킨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국가장을 치른 후, 동작동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다. 제14대 대통령으로 문민정부를 연 YS는 대한민국을 민주대국으로 향하게 하는 물꼬를 틔우면서 큰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대구'경북과는 애증의 관계를 그려갔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워온 YS는 1950년 제2대 총선에 출마한 장택상(경북 칠곡)을 도우면서 정치적인 감각을 배워나갔다. 출발은 여당 쪽이었다. 제3대 총선(1954년)을 한 달 앞두고 자유당 이기붕(총무부장)을 만나서 입당, 거제군에서 출마했다. 첫 도전에 금배지를 움켜쥐었다. 27세, 국회 최연소 의원이었다. 패기 있게 진입한 YS의 정치 역정은 불과 반년 뒤 자발적 야당 정치인으로 바뀌었다.

평소 김구보다 이승만의 정치 감각을 높이 본 YS이지만, 이 대통령이 3선을 위해 불공정하게 '사사오입 개헌'을 하자 탈당, '민주화의 들판'으로 내려섰다. 풍파가 몰아쳤다. 군정 연장 반대 시위(1963년)로 투옥됐고,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1969년)를 당했으며, 유신 반대로 가택연금됐다. 신민당 총재 시절이던 1979년,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하고, 유신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뉴욕타임스에 요구했던 게 빌미가 되어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했으나 10'26 열흘 전 부마사태가 터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최중심에 섰다.

민주화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2'12사태로 정권을 다시 잡은 신군부가 가택연금을 시켰지만, 끝내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새벽으로 이끌었다. 재수 끝에 3당 합당을 통해 김대중'정주영을 꺾고 대통령에 올라 문민정부를 열었다.

이런 YS를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자유 민주 투사로 존경했다.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 골프광인 빌 클린턴 대통령은 방한 시 두 정상이 같이 골프를 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평상시 민주산악회 멤버들과 등산을 하거나 조깅을 즐기던 YS는 단시간에 골프를 치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두 정상 간 운동'을 골프에서 조깅으로 바꾸었다. 근데 클린턴은 조깅을 싫어했다. 설마 이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북한에 대해서 대북 포용 입장을 견지했던 클린턴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대북 강경론의 YS 간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클린턴이 NPT에서 탈퇴한 북한과 직거래 대화를 한 데다가 북한이 약속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친서까지 보낸 사실을 YS가 뒤늦게 알게 되면서 두 나라 간 갈등은 상당히 깊어졌다.

YS는 TK 중심인 하나회 해산과 금융실명제 전격 도입, 공직자 재산 공개와 같은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전광석화처럼 빨리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쯤 가입했으면 좋았을 뻔한 OECD에 20년 전에 성급하게 가입했다. 선진국 클럽인 OECD에 일단 가입하면 모든 규제도, 지원도, 노동도 선진국 수준으로 맞추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덜컥 OECD에 가입한 데다 실물경제 변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클린턴과의 친선 골프 미성사 때문은 아니겠지만, 미국은 외환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에 신속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민주화의 상징 YS는 대한민국을 IMF 위기에 내맡긴 채 정권을 DJ에게 넘겨주었다.

YS와 대구의 인연은 유쾌한 편은 아니었다. 대구로 오려던 삼성차 사업이 껍데기뿐인 삼성상용차만 남고, 삼성승용차는 부산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88년 성상, 어느 하루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꿈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제는 다 내려놓고, 영면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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