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달해의 엔터 인사이트] 벼랑 끝에 몰린 대종상

각종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파행을 거듭하던 52회 대종상 시상식이 결국 '역대 최악'이란 평가 속에 막을 내렸다.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해야 할 남녀 주연상 후보가 전원 불참한 데다, 윤제균과 이준익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스타 감독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끌려온 몇 명의 신인 배우들과 무명 연기자들이 '스타'들의 빈자리를 채워 민망한 상황을 연출했다. 각본 및 주요 기술 부문 수상자들도 대부분 모습을 보이지 않아 대리 수상이 속출했다. '국제시장'에는 무려 10개 부문 상을 한꺼번에 몰아줘 심사 과정의 문제점들을 드러내기도 했다. 역대 수상자들을 전부 초청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시상식장은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이미 1990년대부터 넘쳐나는 비리와 함께 말썽을 일으키며 '없어져야 할 시상식'으로 불렸던 대종상이다. 이 창피한 시상식은 올해를 끝으로 사라져야 옳다.

◆망언-졸속 운영이 빚은 막장 드라마

52회 행사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일이다. 앞서 대종상 조직위원회는 시상식 홍보를 위해 주최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각 부문별 수상자를 두 명씩 선정하고 참석하지 않은 이에게는 상을 주지 않겠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 논란을 자처했다. 워낙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많이 벌인 대종상이지만 특히 이번 발언의 파장은 컸다.

이렇게 되면 수상 후보들의 입장은 더없이 난감해진다. 상 자체가 '개근상' 개념으로 전락한 데다 유력 후보가 불참한 상태에서 상을 받은 이도 결코 떳떳할 수 없다. 무지에 의해 시상식의 근간을 뒤흔든 막말을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자신감인지 대종상 조직위는 분탕질을 해놓고도 후보 섭외를 행사 2주 전에야 시작했다. 수상 후보가 된 스타들의 스케줄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작정 참석해 달라고 통보해 결과적으로 대거 불참 사태를 불렀다. 이미 '공정한 시상식'은 물 건너갔고 후보들의 입장에서도 참석하는 게 오히려 불명예가 되는 상황이라 각종 핑곗거리를 대며 빠져나가기 바빴다. 게다가 2주 전 통보를 했으니 도망갈 '구실'을 만드는 데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남녀 주연상 후보 전원이 참석하지 않은 이례적인 시상식은 이렇게 '완성'됐다. 막장극의 기둥이 만들어진 셈이다.

조연상 후보, 또 신인상 후보들도 모두 참석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신인상을 받은 이민호와 이유영만 직접 무대에 올라가 상을 받았으며 남녀 조연상 수상자 오달수와 김해숙은 이날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신인들의 입장에서는 시상식에 불참했을 때 영화계와 대중의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 나갔을 터. 그 외 배우들은 사실상 대종상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타 케이스에 비해 비싼 비용의 유료투표로 진행된 인기상의 경우, 지난 1년간 영화 출연작이 없었던 김수현과 공효진이 각각 수상자로 지명돼 지켜보는 이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애초 투표를 시작할 때부터 후보 선정을 잘못해 발생한 어이없는 결과다. 이해할 수 없는 수상 결과에 두 배우가 응할 리 없다. 당연히 불참했다.

그나마 대종상 측은 '대리 수상 불가' 방침이 불러온 논란을 의식했는지 현장에 온 후보를 제외하고 불참한 후보에게 상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다 더 우스운 꼴을 보여줘 실소를 자아냈다. 이를테면, 신인감독상 수상자로 지목된 '뷰티 인사이드' 백감독이 현장에 없어 같은 부문 후보로 시상식장을 찾았던 '스물'의 이병헌이 대리 수상하는 등의 '희한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MC는 멀티맨…상 받은 사람은 난처

이날 가장 고군분투한 인물은 MC 신현준이었다. 텅텅 빈 객석에 대리 수상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진땀을 흘리며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본인도 짜증이 날 만한 거짓 멘트를 날려야 했다. 그 와중에 의상 및 미술상 부문을 대리 수상할 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직접 무대 중앙으로 나가 상을 받고 "꼭 전해주겠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여우주연상 부문 시상이 이뤄질 때도 허리 부상으로 불참한 최민식 대신 손예진의 옆으로 가 시상을 진행했다.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뛰어다니는 신현준의 모습 자체가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윤제균 감독도 신현준만큼 난처했다.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국제시장'이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기획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시나리오상, 촬영상, 편집상, 녹음상, 첨단기술특별상 등 10개 부문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시상식인지 알면서도 대종상을 주최하는 원로들과의 관계 등을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참석했을 텐데, 한자리에서 주요 부문을 몰아주니 그 자체가 기쁨이 아니라 곤욕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몇 차례나 무대 위로 올라가 상을 받던 윤제균 감독은 서서히 얼굴이 굳더니 급기야 "상을 받으면서 이렇게 부담스러운 경우도 처음"이라고 속내를 전했다.

시상자 선정도 형편없었다. 영화와 인연이 없는 박해미가 남우주연상 시상자로 혼자 무대 위에 오르고, 역시 영화보다 드라마 이미지가 강한 원기준이 시상을 위해 나타나는 등 당사자들도 민망해할 만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 외에도 이준익 감독의 이름을 이익준이라고 잘못 표기해 내보내는 등 현장 진행상의 미숙함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누가 봐도 시상식 주최 측의 미숙함으로 발생한 문제인데 오히려 그들은 당당하다. '대리 수상 불가' 발언의 당사자인 조근우 대종상 사업본부장은 행사 직전, 수상 후보들이 불참하게 된 상황을 두고 "우리나라 배우 수준이 후진국 수준"이라며 뻔뻔하게 영화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면서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주는 게 관객이고 이들을 위한 영화제를 개최하는데, 스타가 됐다고 보이콧을 한다. 비난받아야 할 이들은 우리가 아니라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참석하지 못할 행사를 만들어놓고 참석하지 않은 이들을 욕하니 더 이상 뭐라 해줄 말이 없다.

배우 김혜자도 대종상 측의 어이없는 행동에 상처를 입었다. 앞서 대종상 측은 새로 신설된 나눔화합상이란 일종의 봉사상을 김혜자에게 주겠다며 참석해 달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김혜자 측은 연극 공연에 바쁜 데다 연기와 무관한 상을 받고 싶지도 않아 불참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도 대종상 측은 영상메시지 촬영까지 하더라도 상을 주고 싶다며 김혜자 측을 설득했다. 그래 놓고는 막상 시상식 전날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한 김혜자 측에 "방송사 사정상 영상메시지 촬영이 어려워 수상을 취소하게 됐다"는 통보를 했다. 김혜자 측의 입장에선 육두문자가 나올 만한 일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데다 조직위 수장들은 제 밥그릇 챙기고 억지 권위만 누리려고 하니 주변 관계자들도 좋게 봐줄 리가 없다. 그동안 영화진흥위원회는 2013년부터 단계별로 줄여온 영화단체 지원사업 기금을 올해부터 아예 후지급 형태로 바꿨다. 수억원씩 지원금을 주면 이 돈으로 온갖 치졸한 문제를 일으키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시상식 이후 진행에 문제가 없었는지 조사를 마친 후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믿을 만한 인물들은 등을 돌리고 국가 지원도 끊어질 판이다. 들어오는 스폰서도 부실하고 문제투성이다. 판단 능력이 흐려진 원로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내보내고 새롭게 재정비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대종상은 의미가 없다. 이대로라면 중국 생중계까지 내보내면서 국가적 망신을 준 이 처참한 시상식이 다시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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