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의 징후는 넘쳐났다. 1998년 알 카에다와 연관한 테러집단이 폭발물을 실은 비행기로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으려 했던 것을 포함, 비행기가 테러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에 대한 경고는 최소한 10여 차례나 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2001년 7월 알 카에다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으며, 테러 목표가 미국 영토 내에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테러 3주 전 공모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체포됐다. 그는 단독 비행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음에도 보잉 747기의 시뮬레이션 훈련을 받으려 했다. 그의 행동은 매우 수상쩍었다. 결론은? 9'11테러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되돌아보니 그랬어"라는 사후판단 편향에 지나지 않는다. 일이 터진 뒤에는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전에 그런 신호들을 잡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보의 세계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유용한 신호와 이를 잡아내는 것을 방해하는 잡음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 신호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무지를 부시 행정부 국방부 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즈펠드는 'unknown unknowns'(알려지지 않은 미지)라고 표현했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라는 뜻이다. 민간 여객기가 치명적인 자폭테러 무기가 되고, 공업용 커터 칼이 비행기 납치 무기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은 모든 게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전에는 어떤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것이 정보 세계의 본질이다.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당했던 수많은 이유를 조목조목 파헤친 '진주만, 경고와 판단'을 쓴 미국 역사가 로버타 월스테터는 그런 정보 세계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했다. "불확실성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고, 이것과 동거해야만 한다. 확실성을 보장하는 어떤 마법도, 법칙도 없다. 우리는 확실성 없이 계획을 수립해야만 한다." 정보를 다루는 일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보를 다루는 일에 큰 딜레마를 안긴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재난의 징후를 찾아내려면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수천, 수만 건의 잠재적 신호들을 하나하나 검토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테러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모든 것을 가능성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테러 신호를 내는 듯한 발신지에 대한 신속하고 광범위한 감시와 추적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심증만으로도 테러 의심 인물에 대한 신체적 자유를 일정기간 제한하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방 조치는 인권침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테러로부터의 안전과 민주주의 기본 가치의 수호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양자택일밖에 없다. 안전한 삶을 위해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의 제한적 유보를 용인할 것이냐 아니면 민주적 가치의 온전한 향유를 위해 테러 위험을 감수할 것이냐 하는. 전자는 불편하지만 안전할 확률이 높고 후자는 불편하지 않지만 안전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민주적 가치와 테러로부터 안전한 삶은 모두 중요하다. 그래서 두 선택지 모두 그 자체로 옳다거나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테러방지법 제정을 놓고 국정원을 테러 방지 컨트롤타워로 하자는 여당의 주장에 "그렇게 하면 인권침해 우려가 있다"며 국민안전처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 다른 기구가 컨트롤타워가 돼야 한다는 새정치연합의 반론은 참으로 공허하다. 테러 예방과 인권의 상호배제적 속성상 어떤 기구를 컨트롤타워로 하든 인권 문제를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9'11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잇따라 테러방지법을 제정했다. 대부분 헌법상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내용이다. 이들 나라 대부분 인권에 관해서는 우리보다 더 철저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 테러 예방도 하고 민주적 가치도 보호하는 용빼는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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