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대통령의 공과(功過)

1993년 8월 12일 전국의 관심은 보궐선거가 열린 대구 동을로 쏠렸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집권 초반 개혁의 고삐를 죄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구 사람들은 YS를 매우 싫어했다. 대구 지역민들은 YS가 집권 이후 각종 현안사업에서 대구를 홀대하고 TK 인사들을 정치 일선에서 밀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자당은 동을 보선에서 총력전을 폈다. 거물급 정치인들을 대구로 내려보내 사실상 동책(洞策)을 맡기는 등 배수진을 쳤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민자당 심판론을 내세운 무소속 후보에게 여당 후보는 두 배 가까운 표차로 떨어졌다. 많은 이들은 YS가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 동을 보궐선거 현장을 취재하던 나 역시 그랬고, 다음 날 전국 신문에 '민자당, 대구에서 참패' 'YS 개혁 타격'과 같은 기사가 도배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생각은 빗나갔다. 선거날 저녁 터진 핵폭탄급 뉴스 때문이었다. 익일자 전국 모든 신문의 톱기사는 모두 '금융실명제 전격 시행'이었다. 선거 결과 기사는 구석으로 밀려났다. YS는 보궐선거 패배 시점에 맞춰 금융실명제 시행 계획을 발표했다. 금융실명제 시행 발표라는 초대형 이슈를 통해 YS는 정국 주도권을 여전히 장악해 나갔고 개혁 역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타이밍을 활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어떤 대통령이든 공(功)과 과(過)가 따라다닌다. YS의 경우 6'25전쟁 이후 최대 국란인 IMF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차남 문제까지 겹쳐 집권 시절 그는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지난 22일 영욕의 세월을 마치고 영면한 그에 대한 언론과 세간의 평가에서는 금융실명제 시행, 민주화 투쟁, 하나회 척결 같은 긍정적 측면들이 더 부각되고 있다.

궁금해지는 게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8년 2월이면 퇴임할 텐데 그에게는 과연 어떤 평가가 매겨질까. 유감스럽게도 지금으로서는 그만의 차별화된 업적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미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홍역을 치르며 임기가 반환점을 지나버린 상황이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국정 동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공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선거의 여왕'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같은 수식어에 안주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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