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부진아, 학사경고 대학생, 카이스트 석사, 도쿄대 문부성 장학생(수학 낙제로 학업 포기), 국내 첫 컴퓨터교재'학습 사업가(사업부도로 빚더미), 포스텍 박사학위, 컴퓨터공학과 교수, 영어민요 강사, 동기유발 전문 강사, 천직 찾기 상담사'''.
계명문화대 허남원(56'컴퓨터학부) 교수의 50여 년 이력서다. 경력들이 워낙 변화무쌍한 탓에 천재의 돌출행동인지 바보의 무모한 도전의 연속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는다. 그의 삶과 이력을 체에 거르면 뭐가 남을까. 누구는 '도전'이 걸러진다고 했고 혹자는 '불도저'가 남는다고 했다. '한국의 천재 프로그램'에 정식 초대됐을 정도니 수재가 맞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주변의 지인들은 그를 '바보 교수'라고 부른다. 천재와 바보의 경계에서 묘한 줄타기를 즐기고(?) 있는 허남원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보았다.
◆"카이스트는 네가 가는 곳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공부불가 학생이었던 허 교수. 그가 계명대 전자계산학과에 합격하자 부친은 "네가 대학생이 된 것으로 만족 한다"고 했다. 첫 시험에서 학사경고를 받고 그의 대학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박박 밀고 도서관에 처박히기를 몇 년. 3학년 때 그는 드디어 장학금 통지서를 받는다. 그의 첫 번째 성공 경험이었다. 어? 나도 되네. 자신이 붙은 허 교수는 카이스트에 도전하기로 했다. 지도교수를 찾아가 상담을 하니 "거기는 네가 가는 곳이 아니다"며 만류했다. 첫 도전은 물론 실패였다. 100점 만점에 10점쯤 받았다. 오기가 생긴 그는 핵심 서적 세 권을 통째로 암기해버렸고 이듬해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카이스트 졸업 후 유명연구소 연구원에 대학 전임강사로 승승장구했다.
'이 정도면…'하고 만족해하던 그를 도전의 장으로 다시 불러낸 건 '일본문부성 국비장학생' 시험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아 오면 유명대학에 교수가 보장되는 그런 자리였다. 1차 관문인 수학과 일본어 회화가 문제였다. 볼펜을 쥔 손가락이 기형이 될 정도로 문제를 풀었고 일본 만화 수천 권을 읽으며 회화를 익혔다. 결과는 전국 1등. 그는 교수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국민PC 붐' 타고 사업 대박, 그리고 도산
가족의 축복과 기대 속에 떠난 도쿄대 유학, 그러나 현지에서 허 교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낯선 과목, 그리고 까다로운 수학이었다. 한국에서는 전국 1위를 했던 실력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차원이 달랐다. "일본에서 전자공학은 수학과 물리기초가 안돼 있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밤을 새워가며 문제를 풀었지만 계속 낙제만 받았습니다." 결국 도쿄대를 자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낙제생이라는 자괴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주변 사람들을 일부러 멀리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한줄기 서광이 찾아들었다. 바로 1990년대 '국민PC 붐'이었다. IT산업이 한걸음 빠른 일본에서 컴퓨터를 익혔던 허 교수는 현지에서 유행하던 주간학습 교재를 떠올렸다. 사업 구상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교수에서 CEO로 진로를 바꾸자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윈스컴, ㈜코리아네트 등 기업체를 잇따라 오픈했다. PC교육 붐을 타고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전국에 지사가 8개, 체인이 200곳이 넘었다. 하루아침에 정보통신 분야의 리더로 떠오른 허 교수. 언론이 그를 주목했고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회사 행사에 거물 정치인, 장관들이 줄을 이었어요. 당시 대선 정국이 시작되면서 입각 제의까지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사업은 번창했고 통장엔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부와 명예만큼 몸도 타락해갔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술자리에 그냥 휩쓸려 다녔다.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회의가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린 허 교수는 사업부터 접었다. 손을 떼자마자 업체들이 연달아 부도가 났다. 집 우체통엔 청구서만 날아들었다.
◆강단에서도 멈추지 않은 도전 열정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그때 아직 자신에게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던 박사학위가 떠올랐다. "제가 생각해도 생뚱맞네요. 빚더미 위에서 또 공부할 생각을 했으니. 당시 무언가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 목표가 다가왔던 것이죠."
늦은 나이에 그는 포스텍 컴퓨터공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입학 후 아무 생각 없이 논문에만 몰입했다. 그의 무모한 도전 앞에 운명은 다시 한 번 길을 터주었다. 입학 7년 만에 포스텍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허 교수는 계명문화대 컴퓨터학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강단에서도 그의 도전은 계속 이어졌다. 허 교수의 사전(辭典)에 '만족' '안정' 같은 어휘는 없었고 그의 '똘끼'가 무료한 일상을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허 교수가 교단에서 벌여 놓은 일은 수도 없다. 2010년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성공학 강사로 데뷔했다. 해마다 대학을 찾아오는 3천여 명 이상 학생들에게 '인생 설계도'를 만들어 주었다. 2000년 초부터는 외국어 민요 부르기에 나서 '아리랑' '군밤타령' 등 전통 민요를 영어, 일어, 중국어로 번역하여 각국에 소개했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에게 천직을 찾아주기 위한 MAPS(Mission For All People School)를 벌이고 있다. 허 교수의 동기부여 프로그램엔 105회 걸쳐 1만여 명이 거쳐 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허 교수는 '한국 교육기부대상'에 후보로 올라가 있다. 수료 인원이 전국 최대이고 교육 효과가 검증돼 수상이 거의 확실시 된다.
학창시절 '너는 공부로 일 낼 놈은 못된다'는 핀잔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가 이룩한 몇 가지 일들은 정말 천재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도 허 교수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천재 안철수를 빗대 '허철수'라고도 하고 '도대체 정체성이 궁금하다'며 '도깨비 교수'로 부르기도 한다. "저도 모르겠네요. 저도 저의 '똘끼'가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니까요. 공부로 튀었을 땐 천재인 듯도 하고 사업이나 세상으로 튀었을 땐 '천치'인 듯도 합니다."
◆허남원 교수 걸어온 길
1960년 경주에서 출생, 1983년 계명대 전산학과를 졸업했다. 1년 재수 끝에 카이스트 전산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지냈다. 1993년 도쿄대 문부성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낙제를 하고 귀국, ㈜컴퓨터꼬레아 등 3개 회사를 설립했다. 반짝 특수를 누리다가 이내 파산을 하고 포스텍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계명문화대 컴퓨터학부 교수를 지내며 청소년을 대상으로 '동기부여 성공학 강의' '천직 찾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