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충효와 선비의 고장 포항 장기면

장기읍성은 고려 현종 2년(서기 1101년) 처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총 길이 1.4㎞의 작은 읍성으로 주로 왜구들의 침략을 방비했다.
장기읍성은 고려 현종 2년(서기 1101년) 처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총 길이 1.4㎞의 작은 읍성으로 주로 왜구들의 침략을 방비했다.

포항의 최남단. 남구 장기면은 읍면지역이 많은 포항에서도 대표적 오지마을 중 하나로 꼽힌다. 도회지와는 멀리 떨어져 풋풋한 인심을 자랑하는 농촌마을이다. 그만큼 외부와 동떨어져 과거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장기면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신라시대부터 이곳에 별도의 관청을 둬 주변 일대를 관장하는 지역으로 삼았다. 당시 왕이 참석해 일월신에 대한 제례의식을 올린 흔적도 이곳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충절의 고장으로, 조선시대에는 당대 학자들의 유배지로서 장기는 매번 역사에 그 이름을 올렸다.

◆보물의 고장, 장기면

장기면의 첫 공식적인 이름은 '지답'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지방제도를 정비할 때 남구 장기면과 구룡포읍'호미곶면을 묶어 붙여준 이름이다. 단순히 한자 뜻풀이를 하면 지답은 '다만'그러나'를 뜻하는 '지'(只)와 '겹치다'끓다'를 뜻하는 '답'(沓)이 합쳐진, 아무 뜻이 없는 글자다.

이것은 한자가 아니라 당시 신라에서 두루 쓰이던 이두문자(우리나라 말에 단순히 한자 음만을 차용한 문자)로 풀이해야 한다. 이두에서 '지'는 성이나 고을을 뜻하는 말이며 '답'은 태양(日) 위에 물(水)이 끓어오르는 모양새다. 물이 끓어오르는 고을, 다시 말해 바다 속에 해를 품고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표현한 선조들의 재치있는 이름이다.

마을 이름에 일출의 의미가 들어가 있었던 점에서, 장기면은 태양 숭배가 행해지던 신라시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기읍성 동문에 있는 조해루(朝海樓) 유적이 바로 매년 새해가 되면 장기현감이 임금을 대신해 제례를 올렸던 곳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조해루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인근에 배일대(拜日臺)란 이름이 새겨진 바윗돌이 발견돼 대강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관청이 장기면에 세워진 이유는 제례의식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기면에서 생산되던 보물의 중요성 때문이다. 말과 인삼, 뇌록 등 7가지 보물이 나와 나라에 진상한 까닭에 장기현감을 칠보(七寶)현감이란 별칭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구 침략에 맞선 선봉 지역

바닷가, 그것도 일본에서 곧바로 흘러오는 해류를 안고 있는 탓에 장기면은 늘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장기면의 방비가 뚫리면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경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장기면에는 5, 6세기부터 다량의 성곽이 축성되기 시작했다. 장기 구읍성과 시령산성, 만리산성 등이 이 시절에 세워진 것들이다. 이후에도 뇌성산성, 장기읍성 등이 추가로 세워져 장기를 경북 동해안 제1 방어기지로 바꿔 놓았다.

문헌상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성곽은 장기 구읍성이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옛 읍성은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석축이다. 둘레는 468자이고, 높이는 12자이며, 그 안에 샘이 2개 있다'고 기록돼 있다. 468자가 약 219m 정도이니, 아무리 산의 비탈진 경사를 이용한 성곽이라고 해도 너무 작은 규모다. 이런 작은 성은 전쟁이 났을 때 농성을 벌이기보다는 방어 전진기지로서 적의 침입에 대비한 망루의 역할이 더 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장기읍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봉수대 흔적이 발견된 점만 봐도 이러한 추측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재빨리 왜구를 발견하고 잠시 적의 진격 속도를 늦춘 뒤 봉화를 통해 내륙의 보다 깊은 곳으로 침략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장기면의 주요 역할이었던 셈이다.

든든한 성곽 없이 왜구와 맞서는 일은 어지간한 애향심이 없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늘 죽음과 함께하는 무서운 삶이 아닐까. 그런데도 장기면은 어김없이 왜구의 침략에 맞서왔고, 승리했다. 일본이 얼마나 장기면 공략에 공을 들였는지는 일본 내 역사 자료에서 더 잘 나타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에 정탐한 자료에는 '포이포진(장기면 모포리에 있던 해군 진영)에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첩보선) 2척, 장졸 217명, 군량미 532석이 있다. 동래(부산 동래 방어진지)로부터 수로로 270리, 육로로 305리'라고 적혀 있다. 도요토미가 부하를 승려로 위장시켜 첩보전을 펼치며 장기면의 방어 태세를 면밀히 살피게 한 기록이다.

이러한 항일정신은 계속 이어져 근현대까지 장기면을 파란의 중심에 있게 했다. 임진왜란 시절 의병장으로 이름 높았던 산서 조경남 선생이 저술한 '난중잡록'에 의하면 장기면은 1592년 4월 23일 왜적에게 함락됐다. 현감 등 관료들이 다 도망간 상황에서도 의병장 이대임'서방경'서극인'김경록'박문우 등 장기주민들은 경주와 영천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며 수백여 명의 왜적을 토벌한 공로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 나라 전체가 일본의 발아래 짓밟혔던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의병장 장헌문과 산남의진(문경새재 이남의 의병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정치익 등 항일투쟁을 하다 죽어간 장기 출신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 등 여러 역사 서적에서 증명한다.

특히 장기주민 300여 명은 '장기 장헌문 의진'이란 별도의 특공대를 결성해 일본의 수비대를 습격하거나 수송품을 노획하는 등의 게릴라전을 펼쳤다. 아직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의병들이 더 많지만, 이들의 활약상만은 현재 장기충효관에 각종 기록물들로 전시돼 있다.

이름 없는 희생을 기리고자 백범 김구 선생은 1948년 8월 15일 '학삼서원'(鶴三書院)과 '경충묘'(景忠廟)란 현판을 직접 붓으로 써서 학삼서원 강당 건물 및 사당에 걸도록 했다. 학삼서원 내 경충묘는 임진왜란 시절 의병장인 이대임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충절을 우러른다'는 경충묘의 뜻을 살펴보면 장기주민들의 애국정신이 김구 선생을 감동시켰음을 미뤄 짐작게 한다. 김구 선생의 자필은 지금도 장기면 학곡리 학삼서원의 현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양에서 천 리 길. 유배로 맺은 인연들

장기는 옛 한양에서 약 1천 리(약 400㎞) 떨어져 있다. 제주도'전남 강진과 더불어 나라의 죄인을 '천리유배' 보내던 대표적 귀양지였다. 이 중 제주도는 역모 등 극히 중죄를 지은 죄인들이 가던 곳이며, 강진과 장기는 주로 세력 다툼에 밀린 관료들이 귀양살이를 하던 곳이다.

비교적 정확한 사료들을 집계했을 때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유배로 장기를 찾은 인물은 박팽년, 설장수, 양희지, 신사철 등 60여 명에 달한다. 야사처럼 비공식적 문헌 내용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배를 훌쩍 넘는다. 이들은 장기에서 단순히 시간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후학을 가르치고 저서를 집필하는 등 다양한 문화의 씨앗을 남기고 갔다. 당대의 석학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지금도 장기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유배로 장기를 찾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조선시대 주자학의 최고 권위자 우암 송시열과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 정약용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송시열은 숙종 때 기사환국에 연루돼 1675년 6월 10일 장기에서 '위리안치'(집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고 그 바깥으로의 출입을 금하는 유배형)를 당했다.

비록 유배자의 신분이지만, 송시열은 동생 시도'시걸'부실과 아들 기태, 손자 주석, 증손자 일원'유원 등 식솔을 대동했을 정도로 당대 노론의 거두로서의 입지를 잃지 않았다. 송시열 일가는 현재 장기면 읍내리 장기초등학교 부지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는 송시열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가 아직 있다.

송시열은 장기 유배 시절 많은 시문과 함께 한국 주자학 사상 최고의 서적인 '주전대전차의'(주자대전에 대한 주석서)와 '이정서분류'(송나라 성리학자 정호'정이 형제의 문집을 모은 책)를 집필했다. 특히 유배 처소의 주인이었던 사인 오도전을 4년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쓴 것으로 전해진다.

오도전은 훗날 장기면의 훈장이 돼 더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은 훗날 송시열을 모시는 영당을 건립했다. 이 영당이 바로 우암학파의 '죽림서원'이다. 안타깝게도 죽림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권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고 말았으며, 지금은 빈터조차 남아있지 않다.

1801년 2월 27일(순조 1년)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장기를 찾은 다산 정약용은 당시 4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록 220일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정약용은 장기의 풍광과 주민들의 삶을 묘사한 130여 편의 시를 담아 '다산시문집'을 남겼다.

여기에는 '장기 동문에서 해 뜨는 것을 구경하며/ 직녀성이 붉은 비단 장막을 짜 만들어/ 동해 바다 푸른 하늘 위에 걸어놨네(후략)'라고 묘사하는 등 정약용이 장엄한 장기 일출에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구구절절이 잘 표현돼 있다.

정약용은 또한 실학의 대가답게 주민들에게 명주실로 그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주변 약초로 풍토병을 치유하는 의학저서 '촌병혹치'를 남겼다. '혹시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한 이름의 이 책은, 불행히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배문화촌으로 재탄생

옛 성현들이 장기에 남긴 자취는 오랜 세월이 지나며 대부분의 건축물이 헐리고, 많은 양의 서적들이 유실되는 등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최근 이들 문화유산을 복원하려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포항시는 사업비 18억원을 투자해 장기면 서촌리 일대 1만여㎡ 부지에 유배문화 체험촌을 건립할 예정이다. 비록 지난 2012년 처음 사업 발표 후 편입 토지 보상 문제로 3년여나 끌어온 사업이지만, 지난해 말 보상 협의가 원만히 이뤄지며 추진에 탄력을 받고 있다.

포항시는 이번 사업을 통해 과거 성현들이 유배를 지냈던 적거지(집)를 복원하고, 다양한 테마공간을 마련하는 등 유배문화를 지역 관광자원화시킨다는 복안이다.

금낙두 장기충효관장은 "가난한 어촌마을이었지만, 장기는 예로부터 충효와 선비 정신이 뿌리 깊게 전승되던 곳이다. 늘 학문하는 분위기가 이어져 왔으며 포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있었다"며 "무수한 유학자들이 남긴 정신문화는 후세의 우리들이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유산"이라고 말했다.

도움말=이상준 향토사학자/대구지방검찰청 영덕지청 사무과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