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희창의 에세이 산책] 이번 생은 글러 먹었다고?

"어머님, 아이는 어떤 아이이에요?" "음, 공부 빼고 다 잘해요. 착하고 싹싹하고 운동도 잘하고…." 다 잘한다면서 왜 썩은 미소를 지을까? '아무리 다 잘해도 공부 못하면 무슨 소용이에요?'라는 표정에서 공부 못하면 실은 다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회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놈의 세상, 공부가 뭔지,

공부하는 목적이 뭘까? 어린 아이도 다 안다. "좋은 대학 가서 돈 많이 주는 직장 가야죠." 공부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다 보니 아이들의 다른 장점들은 사장되고 만다. 공부 말고 다른 걸 잘하는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세상이어야 할 텐데….

"우리 아이는 엄마 말도 잘 듣고 동생도 잘 봐 주고, 근데 공부만 잘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이가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다른 건 다 쓸데없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어머님만이라도 아이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셔야죠." 공부 빼고 다 잘하는 아이들은 다 안다. "아예 욕을 하지 그러세요. 제가 누구 머릴 닮았겠어요?"

"넌 장래 희망이 뭐야?" "건물주요. 근데 우리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 공부도 못하고 집안도 가난하고, 이번 생에서는 글러 먹었어요." 아니, 다 죽어가는 시한부 인생도 아니고 새파란 10대의 입에서 이번 생이 글러 먹었다니? 금 수저 물고 나오지 못했으면 글러 먹은 건가.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만드는 세상이 글러 먹었다. 공부 말고 잘하는 게 많은 아이가 기 펴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없을까,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보다 훨씬 많지 않은가? 가난한 아빠를 둔 아이들이 부자 아빠를 둔 아이들보다 월등히 많지 않은가?

공부를 못했는데 지금은 돈 많이 벌고 잘 산다는 성공스토리는 이제 그만, 가난한 부모 밑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을 갔다는 식의 여러 사람 기죽이는 이야기는 정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대다수 아이들이 공부를 못 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성세대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번 생은 글러 먹었다고? 그럼 다음 생은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라고? 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잘난 사람이야. 이번 생에서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야 해. 이 공부 빼고 다 잘하는 멋있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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