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 <3>경판, 고령 개경포나루에 도착하다

'몽고군 격퇴' 한마음, 남자는 손으로 나르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난해 개장한 개경포주막.
지난해 개장한 개경포주막.
경판을 옮기는 환암대사 일행이 개경포나루에 도착해 머물렀을 사찰은 없어지고, 석조관음보살좌상만 자리를 하고 있다.
경판을 옮기는 환암대사 일행이 개경포나루에 도착해 머물렀을 사찰은 없어지고, 석조관음보살좌상만 자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 경판을 옮기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이 길을 순례길이라고 한다. 수십 일에 걸쳐 천 리 길을 달려온 대장경 경판은 고령 장경나루(개경포나루)에 도착했다. 장경나루에 내려진 경판은 40㎞가량 떨어진 해인사까지 정대불사의 모습처럼 아낙은 머리에 이고, 남자는 지게에 지고 옮겼을 것이다.

글씨를 모르는 까막눈이었던 백성들은 경판의 내용은 몰랐어도 경판을 옮기면서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여기서는 고령군과 성주군, 합천군이 조성하고 있는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고령에 도착한 팔만대장경

환암대사 일행이 10월 초 한양 지천사를 출발해 수십 일에 걸쳐 당도한 곳이 고령 장경나루(현재 개경포나루'여기서는 개경포나루로 표기)였다. 10월 중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쯤 개경포나루에 도착한 환암대사 일행은 개경포나루에서 1㎞가량 떨어진 개포2리 시례골 뒷산에 있는 지장사(현재는 절터 흔적만 있어 가상의 사찰로 표기)에 여장을 풀었다. 지장사 주지인 설운 스님은 마을 앞까지 마중 나가서 고승인 환암대사를 맞이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오늘은 여기서 여독을 푸세요."

이에 환암대사는 "아닙니다. 국운이 걸려 있는 팔만대장경 경판 이운에 고생이라고 할 게 있습니까. 부처님을 모시는 일인데 어찌 힘들다고 하겠습니까"하고 웃어넘겼다.

다음 날 아침 새벽 예불을 올린 환암대사는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사찰에는 이미 수백 명의 스님과 백성이 운집해 있었다.

지금의 지장사는 사찰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무와 풀이 우거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8호인 석조관음보살좌상이 있어 고려시대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조관음보살좌상은 개진면 개포2리 시례골 마을 뒤편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너비 78㎝, 높이 128㎝로 크지는 않지만 보관(寶冠)에 화불(化佛)을 모시고, 연꽃을 손에 쥔 모습으로 보아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머리에는 보석처럼 장식한 관을 쓰고 뒤에는 배 모양의 광배가 조각돼 있다. 얼굴은 둥글고 이마가 넓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토속적이어서 보살로서의 자비로움보다는 속인의 평범하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리고 있으며, 손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몸 안쪽으로 비스듬히 내려 연꽃 줄기를 쥐고 있다. 광배 안에 연꽃 두 송이가 더 새겨져 있다. 결가부좌 한 자세에 두 발은 양 무릎에 갖다 붙인 듯 되어 있다. 고려 성종 4년에 음각된 것으로 조성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팔만대장경 경판이 개경포나루에 도작하기 전 고령 현감은 10월 초 어느 날 고령군 내 곳곳에 방을 붙였다.

'신체 건강한 성인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

방이 붙은 지 3일도 되지 않아 팔만대장경을 옮기는데 고령을 비롯한 인근 지역인 합천, 성주, 칠곡 등 영남 승려들과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승려와 건장한 청년, 노인, 아녀자 할 것 없이 너도나도 팔만대장경 경판을 옮기겠다고 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개경포나루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

스님과 백성 등 수백 명이 줄을 길게 늘어선 개경포나루는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 있는 낙동강변의 나루였다. 현재는 당시 나루터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개경포는 개포나루, 개진포, 개산강, 개산포, 개산진, 가혜진, 가시혜진 등으로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지리지나 읍지, 고지도 등에는 개경포가 '개산강'(開山江) 또는 '개산포'(開山浦)로 기록돼 있다.

개경포라는 이름은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낙동강을 거쳐 개포에서 내려 해인사로 이운한 것에서 유래했다. 민족적 수난기에 조성됐던 호국의 불심을 해인사로 옮긴 징검다리 역할을 한 곳이다.

개경포나루는 대가야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소금과 곡식 등이 이곳을 통해 각 지방으로 운송됐을 정도로 번창했었다. 낙동강 연안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물산의 집산지이며 수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중국 및 일본과 왕성한 교역 활동도 했다. 낙동강 수로를 통해 해인사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가 개경포나루였기 때문에 이곳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려웠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궁중의 보물을 약탈해 일본으로 가져가지 위해 이용했을 포구를 의병들이 가로막고 왜군을 물리친 뒤 보물을 되찾은 곳이기도 하다. 1592년 6월 송암 김면 장군과 박정완 장군 등의 의병이 왜군을 격파한 개산포 전투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조선 선조 때는 낙강칠현의 뱃놀이터로 유명했고, 수십 척의 배와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주막도 30여 채나 되고 가옥도 200여 채가 넘었다.

지금은 고령군이 개경포공원을 만들어 두고 주막촌과 대장경판을 옮기는 조형물 등을 세웠다.

고령군은 개경포 일대에 20억원을 투입해 메모리얼 파크와 주막촌을 건립하고, 개경포에서 우곡면까지 4.2㎞ 구간에 생태탐방 낙동강 역사너울길을 올 연말까지 조성하는 낙동강 신(新)나루 문화벨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또 낙동강변에 낙동수향 휴(休)공원, 휴(休)바이크로드, 낙동강 익스트림 레포츠 파크, 에코빌리지 조성 등을 추진해 친환경 낙동강 멀티레포츠 벨트를 구축할 방침이다.

도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개경포나루는 점차 쇠락해 현재는 나루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 800여 년을 거슬러 올라 개경포나루 전망대에 서서 하늘의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회상을 해본다. 땀으로 배인 이 길을 무슨 마음으로 걸었을까?

◆수백m 길게 늘어선 경판 이운길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엔 팔만대장경 경판을 운반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에는 운반 행렬 맨 앞에 동자가 향로를 들고 길을 앞서간다. 그 뒤 스님들이 독경하며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스님 뒤로는 잘 포장한 경판을 달구지에 싣고 따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 일찍 개경포나루를 출발해 수백m에 걸쳐 길게 늘어선 팔만대장경 경판 이운 행렬은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맨 선두에는 환암대사가 걸었으며, 그 뒤로 스님들과 백성들이 경판을 들거나 머리에 이고 길을 걸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팔만대장경 경판 내용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단 한 가지였을 것이다.

'죽어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과 '나라의 안정'을 원하는 믿음뿐이었다. 이 때문에 힘든 여정이지만 참고 팔만대장경 경판을 옮기는 데 참가했다. 백성들은 팔만대장경 경판이 땀에 젖을까 등에 지지 않고 머리에 이고 옮겼다. 종종 이운행사에서 볼 수 있는 팔만대장경 경판을 머리에 이고 있는 풍경은 바로 이런 유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 경판에 적힌 뜻은 몰라도 나무에 새겨진 글씨 하나하나가 정수리에 박혔을 것이다.

"부처님께 비나옵니다. 몽골군들이 하루빨리 물러가 우리 가족을 지키고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처님의 평안한 안식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젊은이들은 팔만대장경 경판 두 장을 들고, 아녀자들은 한 장을 머리에 이고 경전의 소중한 말씀을 헤아릴 수도 없이 가슴 깊이 되새기며 갔다.

10월 중순 날씨지만 길은 멀고 태양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고, 땀은 얼굴에서 등으로 비 오듯 흘러내렸다. 노인들과 아녀자들은 늦더위에 금세 지쳤다. 팔만대장경 경판 이운 행렬이 속도를 내지 못한다.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은 반나절이 되어서야 개진면 직리에 도착했다.

직리는 팔만대장경 경판이 개경포에서 해인사로 옮겨질 때 마을을 바로 지나갔다고 해서 직통(直桶)이라 불리던 것이 직리로 변했다. 직리에 도착한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일행들은 마을 주민들이 준비해 준 주먹밥과 막걸리 등으로 요기를 하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었다.

개진면은 임란 시 의병대장을 지낸 송암(松菴) 김면(1541∼1593) 장군의 태생지이며, 박정완 장군이 왜군을 무찌르는 등 조선을 지켜낸 충의의 고장이다.

김면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조종(趙宗)'도문위(道文衛)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적병 10만을 우지(牛旨)에서 대치, 공격해 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격퇴하고 크게 승전했다.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고 의병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김면 장군은 난이 계속되는 동안 의갑(衣甲)을 풀지 않았으며, 1593년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충청'전라의 의병과 함께 금산'개령에 진주하였으나, 1593년 과로로 병사했다. 김면 장군의 유적지는 쌍림면 고곡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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