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가 운동에는 크게 소질이 없었지만 달리기 하나는 잘했다고 한다. 노래도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팔공 보성아파트 그의 집에서 친구와 동네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로는 집에서 30리 길 공산소학교를 다닐 때 어린 노태우에게는 그 산길이 너무 멀고 또 무서워서 등'하굣길에는 달리고 또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고 한다. 그 버릇이 요즘까지 남아 특기로 변한 것 같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고 한다.
1979년 12월 12일 오전 5시 중앙청 앞에는 노태우 소장의 9사단 29연대, 박희도 준장의 1공수여단,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병력이 소총에 착검한 채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 승인을 하라며 군사정변을 일으킨 자들이었다. 이 하극상의 주역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9사단장이었다. 이들은 10'26 사태가 있은 후 11월 말부터 모여 반란을 모의했다. 이들 배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이는 당시 1군단장이었던 황영시 중장이다. 9사단은 1군단 예하인데 전방에서 서울로 진입하자면 통일로에 있는 1군단의 전차부대와 사령부 및 공병 여단을 통과해야 했다. 즉, 1군단장의 참여나 묵인 없이 군사반란은 성공할 수 없었다. 반란을 직접 모의한 세력은 하나회 출신의 보안사, 제30경비단 그리고 제33경비단의 영관급 장교들이었다.
당시 국무총리는 신현확이었는데 군사정변을 탐지하고 진압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정부 측의 신현확 총리와 정승화 총장 그 반대 측의 황영시, 전두환, 노태우, 박희도 등이 모두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총칼을 든 군인들이 놓는 으름장에 새가슴인 최규하 대통령은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반란군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반란군은 기세등등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경남 진해에 있던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스스로 '정규 육사 1기'(육사 11기)라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소위 엘리트 생도 몇몇이 5성회를 만든다. 회원으로는 전두환, 노태우, 최성택, 김복동 그리고 박영하가 있었다. 모임이 활성화되자 회원이 늘어나고 이름도 7성회로 바뀐다. 그러다가 1962년에는 회원 숫자가 더 늘어나면서 이름도 하나회로 고정된다. 이들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그들의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모임의 발전은 전두환의 리더십과 박정희의 후광이 크게 작용했다.
노태우가 경북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학도병으로 참전해 헌병 사병으로 근무했고 나중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명문학교에 다닌 만큼 포부도 컸지만, 집이 가난해 청운의 꿈을 펼치지 못한다. 지금은 대구시가 되었다지만 여전히 첩첩산중인 대구 동구 신용동 용진마을. 그는 7살 때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기술자로 호구지책 하려고 1945년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자질을 미리 알아본 교장과 삼촌의 권유로 경북고로 전학한다.
노태우가 운동에는 크게 소질이 없었지만 달리기 하나는 잘했다고 한다. 노래도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 팔공 보성아파트 그의 집에서 친구와 동네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로는 집에서 30리 길 공산소학교를 다닐 때 어린 노태우에게는 그 산길이 너무 멀고 또 무서워서 등'하굣길에는 달리고 또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고 한다. 그 버릇이 요즘까지 남아 특기로 변한 것 같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고 한다.
전쟁이 나도 잘 먹고 잘 사는 집 애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출세하고 부자 되는 모습을 보았다. 농투성이 아들인 노태우는 군대를 빼줄 사람도 없었거니와 또 그렇게 비겁하게 살기는 싫었나 보다. 학도병은 군적이 없어 군에 갔다 와도 흔적이 없다. 결국 다시 군에 가야 하는데 학비도 들지 않고 남들을 지휘하는 장교가 되고 싶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지방 출신 사관생도들이 처음에는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끼리 친목 도모를 위해 만들었던 하나회가 차츰 정치화한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주역인 육사 8기생들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육사 11기(4년제 육사의 첫 기수)의 하나회를 그의 친위대로 키운다. 그 무렵 육사 8기생들은 이북 출신과 육사 5기생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들의 전횡을 즐기고 있었다. 8기생의 대표적인 인물이 경북 청도 출신 윤필용이었다.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은 하나회의 전두환을 그의 수하에 두며 큰 형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위 '윤필용 사건'이 터진다. 김종필이 다음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말을 해서 박정희의 역린(逆鱗)을 거슬린 윤필용은 숙청되어 겨우 목숨을 건지고 군복을 벗게 된다. 이 사건은 전두환도 함께 전역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의 친위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하나회는 조그마했던 지렁이가 나중에는 거대한 공룡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군사정변 후 군인들이 정치인이 되고 나라를 운영하게 된다. 정치 아마추어인 군인들이 정치판에 끼어들었다가 노련하고 교활한 프로들에게 말려들어 된통 당한다. 그들의 '오프사이드 트랙'에 걸려 국군이 국민에게 총질하는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이 원죄가 되어 두고두고 군 출신 정치가들의 목을 조이게 된다. 노태우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 대통령이 된다. 재직 시 그는 소위 '북방외교'라고 해서 적대관계였던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한다. 소련, 중국을 비롯한 몽골,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와 국교를 맺고 알제리, 말리, 앙골라 그리고 탄자니아 등의 제3세계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맺는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이 크게 울었다고 한다. 철석같이 기대고 있던 형님국가인 소련과 중국이 '남조선 괴뢰' 따위와 수교를 맺었으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노 대통령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도시의 깡패들을 소탕한다.
노태우는 정변을 일으킨 불량군인이다. 그러나 그는 '물 태우'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 업보를 씻는데 전념한다. 1990년 3당 합당을 하며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든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그 물 덕택에 군사정권은 종식되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만약에 그가 '불 태우'라는 별명을 들었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군인들이 정치하는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 교수는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가장 진보적인 정책을 수행한 대통령이었다"고. 그가 토지공개념을 도입한 사람이었기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런 사상은 그가 땅을 갈아 먹고살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기에 창출된 철학이었으리라.
입대를 기피하고 평생 세금 한 번 내지 않고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있고 전쟁마다 목숨을 걸고 참전을 하고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살다 대통령이 되는 사람도 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나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면서 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용은 다만 여의주만 물면 된다.
"처음에는 비록 미약할지라도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욥기 8장 7절.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