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호랑이를 영물로 여겼다. 재앙을 물리치고 잡귀도 쫓는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호랑이 그림을 대문 앞에 붙이기도 했다. 표범도 같은 반열에서 대접받았다. 부귀와 행복을 염원하는 민화 길상도(吉祥圖)에 까치와 함께 등장하는 동물은 표범과 호랑이였다.
호랑이와 표범은 또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호랑이에 물려가는 호환(虎患)이 잇따르자 조선시대에는 착호군(捉虎軍)이라는 호랑이 사냥 전문 부대가 생겨났다. 호랑이를 잡은 착호군에게는 공을 따져 두둑한 포상도 내렸다.
호랑이와 표범 가죽은 권위의 상징으로 고관대작에게 상납 되거나 비싼 값에 거래됐다. 호피를 상납하고 당상관(정3품 이상 벼슬)을 사는 경우도 생겨났다. 태조에서 선조까지 208년 동안 표범 가죽 788필이 왕실에 진상됐다는 기록도 있다. 1년에 4마리꼴이었다. 구덩이로 함정을 파거나 활과 창 등의 당시 무기로 이만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화승총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화승총은 최대 사정거리 1㎞, 유효 사정거리가 약 200m에 이르렀다. 활과 창에 비해 대량 포획이 가능해졌다. 호랑이 사냥은 일제강점기에 정점을 찍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의 안전에 해가 되는 동물 제거'라는 해수(害獸) 구제사업으로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을 무차별 포획했다. 심지어 일본 재력가들은 '조선 호랑이 사냥대회'를 열기도 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는 1915년부터 27년간 호랑이 97마리, 표범 624마리, 곰 1천39마리, 늑대 1천396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했다. 한 해 평균 호랑이 3.6마리, 표범 23마리, 곰 38마리, 늑대 51마리씩 잡아들인 셈이었다. 일제의 '해수구제' 명분은 호피 확보 전쟁으로 변질했다. 당시 표범 가죽 한 필은 쌀 10가마, 호피 한 필은 쌀 60가마에 이를 만큼 고가에 거래됐다. 이렇게 사들인 가죽은 일본으로 넘어가 귀족층의 전유물이 됐다.
호랑이는 1940년 함경북도에서 한 마리 포획을 끝으로, 표범은 1962년 합천에서 한 마리 생포 소식을 끝으로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췄다.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지자 늑대가 득세했다. 늑대는 1950, 60년대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다. 마을까지 내려와 염소와 돼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았다. 잠자는 어린아이를 채 가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늑대 역시 무분별한 포획에다 쥐잡기 운동으로 쥐약 먹은 쥐를 먹고 떼죽음 당하는 수난을 겪다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늑대마저 떠난 지금 수천 년간 명함도 못 내밀던 멧돼지가 '맏형'이 됐다. 멧돼지는 포식자들의 밥이 되고도 충분히 대를 잇도록 진화해 왔다. 멧돼지처럼 한 배에 새끼를 7~13마리까지 낳는 다산의 동물은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멧돼지가 호랑이 자릴 꿰찼으니 낳는 대로 불어나 개체 수는 수십 년 만에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개발로 더욱 줄어든 숲 속에서 영역 다툼도 한계에 다다랐다.
경쟁에서 쫓겨난 멧돼지들이 논밭으로 뛰어들고 있다. 빌딩 속을 배회하는 일도 잦아졌다. 매년 수백억원대의 농작물 피해가 반복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야생 멧돼지에 물린 50대 여성이 과다 출혈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멧돼지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가 돼버렸다. 매년 1만 마리 이상이 '유해 조수'란 딱지로 엽탄에, 올무에 쓰러지고 있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간섭이 도를 넘으면 되레 인간을 공격한다. 따지고 보면 멧돼지의 습격은 상위 포식자를 멸종시켜 야생의 먹이사슬을 끊어버린 사람들의 잘못이 원죄다. 100여 년 전, 호랑이를 멸종시킨 결과는 지금 멧돼지의 습격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멧돼지는 생존 본능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멧돼지는 죄가 없다. 멧돼지의 습격은 무죄(無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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