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올해의 거짓말

1992년 12월 18일은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된 날이다. 23년 전의 어느 하루를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치기가 부끄러워서다.

고인을 욕되게 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움켜쥔 그의 행보가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던 세력에게 심한 배신감을 안긴 것은 팩트다.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YS가 대통령 되면 한국을 떠나겠다'고 말하던 나는 공교롭게도 그가 대업(大業)을 이루던 날, 유학길에 올랐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라던 그의 출사표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문민정부를 이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3당 합당이 남긴 후유증도 컸다. 우리 정치의 고질병으로 꼽히는 지역 패권주의는 굳어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표현처럼 '기회주의의 창궐'을 불렀다.

YS를 떠올릴 때 또 하나의 추억은 1993년 만우절의 거짓말이다. 그해 4월 1일 아침 일찍, 함께 공부하던 한 후배가 '김 전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줬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나는 대구 부모님께 사실 확인차 전화를 드렸고, "야가 지금 무슨 소리 하노"라는 핀잔만 들었다. 후배의 절묘한 아이디어에 지금도 헛웃음이 나오지만, 다시 군부 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한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러나 진짜 큰 거짓말도 남겼다. 대선 공약으로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집권 1년도 안 돼 수입 빗장을 열었다. 결국 그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막바지였던 1993년 12월 9일 대국민 사과담화문을 발표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올해 프로야구 또한 거짓말로 얼룩졌다. 21세기 최강 팀이라는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해외 도박 파문에 얽히면서다. 억울하다며 혐의를 부인하던 한 선수는 검찰 수사에서 도박 사실을 인정했다. 다른 선수들의 혐의도 조만간 진실로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선수 관리에 허점을 드러낸 구단 역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한국 대표팀이 '프리미어 12' 결승에서 무너뜨렸던 일본 프로야구 역시 선수들의 일탈로 홍역을 앓고 있다. 일본 최고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선수 3명이 불법 스포츠 도박을 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양국의 도박 스캔들을 지켜보면서 지난 3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이 지면에 썼던 칼럼이 생각났다. 'You'll Never Walk Alone'(당신은 혼자가 아니랍니다)이란 제목의 글에서 나는 프로 선수들이 공인으로서 책임감을 느껴주기를 소망했다. 팬이 그들에게 보내는 갈채에는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민들이 꿈도 꾸지 못할 거액을 받는 그들이 사려 깊지 않은 행동과 거짓말로 팬을 실망시킨다면 배임죄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고객의 이익에는 관심 없이, 자신들의 요트 자랑에만 몰두하는 월스트리트 금융인들의 모럴 해저드를 비판한 프레드 쉐드의 저서 '고객의 요트는 어디에 있는가'가 상기되는 대목이다. 팬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2일 아침, 고 3인 큰아들에게서 휴대전화 문자 한 통이 왔다. 학교에서 받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그 순간, 거짓말이 통하지 않게 해준 문명의 발달이 고맙기도 했지만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기성세대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쉬운 시험의 기조를 유지하겠다"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예고가 '올해의 거짓말'로 꼽힐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처럼 어른들 말만 믿었다가 인생을 망쳤다"는 학생들의 하소연이 귓가를 맴돈다. '물 수능'인 줄 알았다가 '눈물 수능' '로또 수능'에 울었을 애들아! 정말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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