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대구 유도 꿈나무 키우기에 매진 황기철 대구시유도협회장

'대구 유도의 금맥 다시 잇기' 그 한 가지 생각으로 15년 달려왔습니다

"초등학교에 유도부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대구 유도의 중흥을 위해선 저변 확대가 가장 절실한 과제입니다." 황기철 대구시 유도협회장이 유도회관에서 후배들에게 기술지도를 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1970년대 유도선수들에게 토로피보다 더 절실한 건 당장 배부른 밥 한 끼였고 메달 색깔보다 더 긴급했던 건 해진 도복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힘들었던 시절 선수들에게 유도는 운명이었고 운동은 일상이었다. 부유한 집 아이들은 굳이 힘든 운동을 시킬 일이 없었으니 하루 수백 번씩 매트에 몸을 던지는 일은 가난한 아이들의 몫이었다.

우승 후에 '보상'으로 주어진 불고기를 먹으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말리라.' 나중에 돈을 벌면 힘들게 운동하는 후배들을 위해 '밥'과 '도복' 후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했다.

누구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였는데 운명은 묘하게 풀려 갔다. 선수로서 황기철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무관(無冠)으로 도복을 벗어야 했다. 대신에 가업으로 시작한 중국집이 대박 나면서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불어가는 통장에 흐뭇해 있던 황 회장에게 어느 순간 젊은 시절 약속이 떠올랐다.

봉사할 기회를 찾다가 대구시 유도협회에 회원으로, 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회장 경선에 나서 대구시 유도협회장에 당선됐다. 그로부터 15년째 지역 유도 발전을 위해 지금까지 동분서주하고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꿈은 접었지만 대신 지갑을 활짝 열어 지역 꿈나무 육성에 전념하고 있는 황기철(64'자금성 대표) 회장을 유도회관에서 만나 보았다.

◆지역 유도 발전 위해 15년간 3억원 출연

봉사와 선행에도 결이 있다. 음지에서 익명으로 나눔의 손길을 펼치기도 하고 양지에서 폼 나게 지갑을 여는 사람도 있다. 황 회장 스타일은 명백히 후자다. 2001년 유도협회장을 맡았을 때부터 매년 2천만원씩 협찬을 약속했고 이제까지 총 3억원을 협회 재정에 보탰다. 부회장 7명도 매년 일정액을 갹출해 2천여만원을 출연하고 있다.

"협회 1년 예산이 연 1억2천만원쯤 됩니다. 집행부에서 이렇게 솔선해서 기본 운영비를 모으고 나머지는 승단비, 광고로 살림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솔선, 봉사 덕에 황 회장은 4대째 협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2001년 6회 첫 회장 도전 때만 경선을 거쳤고 그 이후 7, 8, 9대 회장 선거는 대의원 만장일치에 의한 단독 추대였다. 전국에서 이렇게 '장기 집권'한 사례는 많지 않고 지역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황 회장의 공적과 관련된 일화 중 지역 유도계 화합을 이룬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처음 취임했던 2000년 무렵은 대구 유도계가 극도의 내분을 겪었던 시기였다. 계성고, 영신고, 덕원고 라이벌들 알력에 영남대, 용인대 출신들 파벌 싸움까지 겹쳐 협회 존폐의 위기까지 거론되었던 때였다. 다행히 황 회장은 양쪽 트러블을 조정할 수 있는(계성고, 영남대 출신)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갈등을 잘 봉합할 수 있었다.

이런 공로로 황 회장은 작년 대구시 문화상 시상식에서 '체육 부문'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계성고 때 유도부 주장으로 전국대회 활약

황 회장이 도복을 입은 건 대건중 재학 시절. 당시는 돼지털이 숭숭 삐져나온 매트 위에서 몸을 굴릴 때였다. 우승컵보다 당장 눈앞의 소고깃국이라는 생리적 보상이 더 절실하던 시기였다. 계성고로 진학을 하면서 황기철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경북 대표(당시에는 대구시 대표가 없었음)로 출전하면서 승전보를 실어 날랐다.

"1969년 당시 제가 계성고 유도부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북에서는 천하무적이었고 전국에서는 4강 전력에 들 정도였습니다. 아직 인적(人的), 물적 인프라가 약했던 시절이었으니 대구경북 패권으로 만족해야 했죠. 그러나 저희들이 당시 쌓아 놓았던 기초가 안병근, 김재엽, 이경근으로 이어지는 금메달 레이스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고교 시절 별명이 '악바리'였을 정도로 파이팅이 좋았고 단체경기에선 언제나 선봉에 섰다. 경북부별대회 무제한급에서 우승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던 황 회장은 아쉽게도 전국대회에선 은, 동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대신 황 회장 취임 후 대구 유도가 전국 체전에서 준우승을 두 번 차지했고 소년체전에서도 종합 2위를 네 번이나 달성하면서 체면치레를 했다. 그러나 아직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한 점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도인들은 지역 유도의 부진 이유로 저변화 실패를 든다. 아이들이 유도가 무슨 종목인지도 모르고 학부모들도 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유망주를 발굴해 한참 훈련을 시킬라치면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 버립니다. 매트에서 메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는 거죠."

◆유도 대중화, 선수 저변 확대 시급한 과제

'식민지 백성은 주먹이라도 세야 한다'던 이상화 시인의 주장처럼 일제강점기 대구 유도도 항일 전통을 이어갔다. 유도 종주국이었던 일본 선수들을 메치며 전국을 평정하던 대구 선수들의 활약은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있다. 이런 항일 정신은 1980년대 올림픽 이후 국위 선양으로 연결됐다. 안병근, 김재엽, 이경근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며 대구 유도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세계 올림픽 역사상 한 종목으로 세 개의 금메달을 석권한 도시는 대구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전통을 이어받은 대구시 유도협회는 대구 유도의 중흥과 선수 저변 확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황 회장 취임 이후 우선 지역 유도의 산실인 '안병근올림픽기념관'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시민들의 체육공간으로 거듭나게 했고 한쪽에 '대구유도역사관'을 세워 지역 유도 역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1986년부터 벌여온 '한일청소년유도대회'는 29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전통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구 유도가 처한 현실은 어둡기만 하다. 우선 선수 수급 문제가 가장 절실한 현안이다. 한 자녀 시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거칠고 힘든 운동을 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초등학교 유도 팀은 15개가 넘었는데 지금은 세 곳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초교에 선수가 없으니 중'고'대학팀이 연쇄적으로 흔들리고 있어요. 대구에 훌륭한 코치들도 많고 경기장 시설도 훌륭합니다. 저희를 믿고 자녀를 맡겨주시면 끊겼던 금맥을 다시 이어 보겠습니다."

황 회장은 얼마 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올 정도로 큰 병을 앓았다. 좋아하던 술도 끊고 회식도 멀리하고 있다. 그 한가해진 틈새와 공백을 오롯이 메우는 건 황 회장의 유도 열정이었다.

◆황기철 회장이 걸어온 길

1969년 계성고를 졸업하고 영남대 사범대학을 거쳐 계명대 산업대학원(체육학 석사)을 마쳤다. 고교시절 유도부 주장을 맡아 전국대회 4강 전력을 이끌었다. 1992년 중국요리 전문점 '자금성'을 개업하고 대구시관광협회 회장(직대)을 역임했다. 이때 공로로 2007년 '관광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2001년 대구시 유도협회장을 맡은 후 15년간(6, 7, 8, 9대) 협회를 이끌고 있다. 2014년에 대구시문화상(체육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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