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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응답하라 1946

1966년 대구생. 경북대 석사. 계명대 언론학 박사
1966년 대구생. 경북대 석사. 계명대 언론학 박사

'조선의 주요 산물인 쌀의 문제는 그 정도를 넘어 사회문제화 되어 우리 건국 도상에 커다란 문제의 하나다. 이 문제의 해결은 시각의 문제로 신중히 연구하여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무서운 파괴성을 가져올 염려가 농후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46년 3월 3일 자 남선경제신문의 '미곡에 대한 의문'이라는 제목의 사설이다. 당국의 미곡 수집령을 무모한 정책이라 질타한다. 다른 물가는 자유방임에 두고 미곡 가격만 통제해 매수권을 발동한 것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쌀값만 통제하면 공급이 부족한 다른 제품의 가격이 크게 오르는 만큼 시장 가격 조절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게다가 주민들의 유일한 식량인 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경우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한다.

우려는 일곱 달 뒤 현실로 드러난다.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쌀값 폭등과 식량 정책의 실패는 주민들의 굶주림으로 이어진다. 사흘을 굶주린 부녀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하면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이야기마저 나돈다. 미국 군정 당국은 제때 대책을 세우지 않고 미적거린다. 민생고 해결에 뒷짐을 진 채 주민들의 불만을 억누르는데 초점을 맞춘다.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대구에서 번져나간 10월 항쟁의 시작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넘쳐나던 감격, 자유, 기쁨이란 단어는 이처럼 식량난이나 물가 등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옮아간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창간한 남선경제신문이 민생 경제에 최우선을 둔 것은 시대적 상황을 바로 본 것이다. 이는 '나라의 자주적인 독립을 이루려면 경제 발전과 엄정하고도 공평한 정치의 힘'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창간사에 잘 나타난다. 지면에 시장 물가란을 만들어 하루하루의 가격 정보를 제공한 것만 하더라도 높은 물가로 고통받는 서민 경제의 중요성을 나타낸 것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되지 않았다. 열악한 사회'경제적 현실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 등 정치적 혼란과 겹쳐 주민들의 일상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해방이 돼 많은 동포들이 돌아오지만 산업시설이 열악해 일자리가 없다. 대구경북만 하더라도 1946년 5월 말 통계 기준으로 실업자가 16만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온다. 경북 도내 158개 광산 중 5, 6개소만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실업난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8월 이후에는 콜레라가 만연해 대구경북에서만 여름을 넘기기 전 이미 3천500여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뿐만 아니다. 위폐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가 검속을 당하는가 하면 일제강점기의 고문 형태를 반복하는 경찰이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회나 결사의 자유도 점점 위축된다. 가령 집회를 하려면 집회 허가서를 그 지방 경찰서에 제출하고 서장이 추천서에 의견을 첨부해 허가 여부를 결정 받는 식이다. 해방의 부푼 꿈과 거리가 먼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는 오늘은 못할지라도 내 자식들에게는 보다 나은 내일을 물려줄 수 있다는 버팀목 때문이었다.

남선경제신문도 일제의 유산을 털어내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경제적인 정의를 추구하는데 목소리를 냈다. 지금 비춰보면 청춘들이 희망 없는 나라를 빗대어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일컫는 '헬조선'의 진단과 닮아 있다. 사회적 갈등과 빈부 격차가 양극으로 치닫고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우려의 소리마저 나오는 2015년과 다르면서 같은 데자뷔다. 남선경제신문은 1950년 9월 천주교 대구대목구 유지재단으로 운영권이 바뀐다. 지금의 매일신문이다. 2016년 새해면 70주년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이미 전편의 인기를 뛰어넘었다. 매일신문은 '응답하라 1946'을 뛰어넘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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