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민은 과거의 단절을 극복하고…베트남 국민과 협력해 나가야 한다…양국 간에 일시적으로 불행한 시기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 두 나라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하며…진정한 동반자가 될 것을 확신한다."(한국) "베트남 내에 과거 한국군의 참전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나 양국이 과거에 식민통치 하에서 같은 고난을 겪은데 비하면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한 것이었고 한'베 두 나라 국민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자."(베트남)
1992년 우리와 베트남이 외교를 재개했다. 사실 양국은 동병상련과 우여곡절의 역사를 공유했다. 긴 세월 각각 식민지배를 받았고 남북으로 갈려 동족 대결도 벌였다. 1956년 베트남 월남 정부와 손잡고 우리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6차례 31만여 명을 파병해 베트남 월맹군과 맞섰고 1975년 월남 패망과 베트남 통일로 관계는 끊겼다.
국제사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양국은 마침내 1992년 재수교했지만 앞서 오랜 교류의 인연을 나눈 사이다. 고려 때 베트남 왕자 이용상은 고려에 귀화, 화산 이씨(李氏)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진주 선비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일본 포로로 잡혀가 베트남을 세 차례 들르는 기록을 남겼다. 숙종 때(1687년) 제주도민 24명이 표류해 베트남에 들렀다 온 기록도 남아 있다.
물적 교류도 전한다. 1885년 조선의 흉년으로 당시 프랑스 식민지배의 베트남에서 966t의 쌀을 원산항으로 수입했다. 이어 이듬해 조선은 프랑스와 수교했고 이후 홍수나 흉년으로 식량난 때 수시로 베트남 쌀을 들여왔다. 1901년과 1902년에는 베트남 쌀 수입이 4천967t과 5천196t이나 됐다(정상천, '한국과 프랑스, 130년간의 교류'. 2015년).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국교 재개로 두 나라 교류는 더욱 활기차다. 특히 국제결혼에서 두드러진다. 국내 결혼 이민자 30만5천여 명 중 베트남 출신이 5만8천여 명, 20만7천여 명의 다문화가정 자녀 가운데 베트남 부모를 가진 자녀가 5만7천여 명으로 각각 최고다. 마침 지난주 경북도가 베트남 타이응웬성과의 자매결연 10년을 맞아 '100년 우정'을 약속했다. 활발하게 협력해온 새마을운동 등 다양한 분야로 교류를 넓혀 우정을 잇자고 약속했다. 두 지역의 '100년 우정'이 두 나라 '100년 미래'의 초석이 되기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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