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 <4>대가야읍에서 두 갈래 나뉘다 -가야산 지나는 순례의 길

"부처님 말씀 옮기고 있다" 환암대사 설법에 깨우친 백성들

성주 대가천과 합천 안림천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 만나 만든 회천이 고령군 대가야읍 마을 앞을 휘감아 돌고 있다.
성주 대가천과 합천 안림천에서 흘러들어 온 물이 만나 만든 회천이 고령군 대가야읍 마을 앞을 휘감아 돌고 있다.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건넜을 섶다리가 있던 자리에 고령군은 내년 6월까지 현수교와 아치교를 결합한 305m의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건넜을 섶다리가 있던 자리에 고령군은 내년 6월까지 현수교와 아치교를 결합한 305m의 '대가야 목책교'를 건설 중이다.
임금이 마셨다는 왕정. 현재는 고령초등학교 내에 있다.
임금이 마셨다는 왕정. 현재는 고령초등학교 내에 있다.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 3대 의병장이었던 송암 김면 장군 유적지.
고령군 쌍림면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역 3대 의병장이었던 송암 김면 장군 유적지.

길은 사람과 마을, 고을과 도시를 이어주는 소통의 통로이며, 신지식과 문물이 교류하는 연결망이다. 산에는 고갯길, 강에는 나루, 바다에는 뱃길이 만들어졌다. 개경포나루를 출발한 팔만대장경 이운 길은 간절히 호국을 염원하는 신성함 그 자체다.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개경포나루에서 대가야읍으로 이어지는 경판 이운 길은 한 길이었지만, 대가야읍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대가야읍을 지나 미숭산과 합천군 야로면을 거쳐 해인사로 가는 길이 있으며, 덕곡면과 성주 수륜면, 가야산을 거쳐 해인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 두 가지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 양 갈래 길을 모두 걸어가기로 했다. 고령군과 성주군, 합천군은 두 길을 각각 순례의 길과 성찰의 길로 정하고,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을 조성하고 있다. 우선 순례의 길부터 가 보기로 하자.

◆팔만대장경, 대가야의 품에 안기다

환암대사는 마음이 답답하고 급해졌다. 개경포나루를 출발한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개진면 열뫼삼거리를 지나면서 더디기만 하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산을 넘어가고 있다. 오늘 내로 금산재를 넘어야 하지만 몸이 가녀린 아녀자들의 발에는 이미 물집이 잡히고, 뒤처지기 시작했다. 금산재를 눈앞에 두고 개진면 양전2리 풍등골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했다.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풍등골에 도착하자 풍등골 백성들은 너도나도 음식과 고기, 술 등을 내왔다. 하루의 여정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다음 날 금산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차로 10분이면 넘어갈 수 있는 금산재이지만 이 당시 금산재는 꼬불꼬불하고 길이 좁아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오솔길뿐이었다. 결국 소가 끄는 수레는 포기하고 스님과 백성들이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갈 수밖에 없었다. 경판 이운 행렬 끝이 금산재를 오르는 데 5시간이 더 걸렸다. 땀 줄기가 등을 따라 내려오고,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의 금산재 일대에는 산림녹화기념숲이 조성돼 있다.

환암대사는 백성들의 땀을 닦아주고 어깨를 다독였다. 물집이 생겨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녀자들의 발에 잡힌 물집을 직접 짜주기도 했다. 백성들은 고승인 환암대사의 이런 행동에 한결같이 탄복했다.

환암대사는 금산재 정상에 올라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이 지금 옮기는 대장경은 불교 경전의 전부를 가리키는 말이며, 내용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三藏)으로 구성됐습니다. 삼장은 '세 개의 광주리'란 뜻이고, 경장은 부처님이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은 광주리란 뜻입니다.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조항과 그 밖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며,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해 해설을 달아 놓은 것으로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 됩니다."

또 "팔만대장경은 '대장경'에 '팔만'을 덧붙인 이름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부처의 삶과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구성은 첫째 대승삼장, 둘째 소승삼장, 셋째 보유잡장(補遺雜藏)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환암대사의 설법이 끝나자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그제야 이해가 돼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리에 이고 있는 팔만대장경이 이렇게 대단한 내용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금산재를 넘어 눈앞에 펼쳐진 곳은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군이다.

금산재를 내려오는 길은 수월했다. 마침 가을 바람도 코스모스 향기를 실어 나르며 기분을 좋게 만든다. 금산재를 내려온 경판 이운 행렬은 고령 대가야읍을 휘감아 도는 '회천'을 만났다. 며칠 전에 내린 가을장마로 인해 물이 불어 있었다. 다행히 고령현감은 회천을 건널 수 있도록 큰 통나무를 잘라 섶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고령현감은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을 위해 대가야 궁성이 있었던 고령향교에서 큰 연회를 열었다.

대가야읍 뒤편 주산에는 남동쪽으로 능선을 따라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고분 704기가 줄지어 있다. 지름이 20m가 넘는 대형 고분부터 중형 고분, 소형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분들 중 가장 큰 것이 금림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제44호 고분은 중앙에 주석실이 있고, 남쪽과 서쪽에 부석실을 두고 있다. 그 둘레에 32개의 순장을 위한 소석곽이 발견돼 순장제도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데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이다. 대가야 고분군은 지난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되고, 2015년 세계유산 우선등재대상으로 선정돼 2018년 최종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우륵을 만나다

연회가 끝나고 환암대사는 '왕정'을 찾았다.

왕정은 임금이 마셨던 우물이었다. 지금은 고령초등학교 운동장 안에 있다. 왕정의 수심은 50㎝밖에 안 되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홍수가 나고 폭우가 쏟아져도 물이 불어나지 않으며, 물이 탁해지지도 않고 쉼 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신비한 우물이다. 현재는 팔각지붕이 세워져 있으며 가로세로 1m의 석축을 쌓은 다음 동쪽 입구만 트고 위에는 넓고 편평한 돌을 덮어뒀다.

왕정의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신 환암대사는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을 보았다. 별들은 금방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가야금 소리가 한줄기 청량하게 들려온다. 가야금 소리에 이끌린 환암대사는 발길을 옮긴다.

환암대사는 주산과 이어지는 산등성이에 있는 청금정으로 올라간다. 청금정에는 가야금을 타고 있는 한 여인이 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백옥 같으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손가락은 길고 가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가야금을 타는 듯했다.

환암대사는 "어찌 이 밤에 혼자 가야금을 켜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스님 저는 도희라 하옵니다. 저는 우륵 선생의 후예입니다. 스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령의 악기인 가야금 소리를 어찌 들려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나라를 위해 팔만대장경 경판을 무사히 합천 해인사까지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다소곳이 절을 한다.

도희는 '상가라도'를 연주했다. 그 웅장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대가야읍의 밤하늘 아래 울려 퍼진다. 환암대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가야금의 선율에 매료된다. 왕정에서 1㎞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륵을 기념하는 탑이 있다.

◆가짜 됨박으로 왜군을 격퇴하다

주산에서 남서쪽으로 가면 쌍림면이 있다. 쌍림면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 3대 의병장(고령 김면, 의령 곽재우, 합천 정인홍)으로 손꼽히던 송암 김면(金沔'1541∼1593) 장군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돼 있다.

김면 장군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과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 명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적의 선봉을 역습해 크게 승리를 거둔다.

여기서는 김면 장군의 부인 전주 이씨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씨는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정숙한 여자였다.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남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른 봄에 이씨는 양전리 마을 사람들에게 모든 논밭에 박을 심도록 했다. 식량으로 쓸 곡식도 모자라는 판에 박을 심으라니 백성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렇지만 마을 백성들은 평소 이씨를 믿고 따랐기 때문에 그저 시키는 대로 박을 심었다.

가을이 되자 논과 밭에는 온통 보름달만 한 박이 영글었다.

부인은 "박을 쪼개지 말고 속을 모두 파내 됨박을 만들고 송진을 진하게 칠하도록 하세요"라고 백성들에게 부탁했다.

됨박은 박을 쪼개지 않고 둥근 모양 그대로 꼭지 근처에 구멍만 내고 뚫고는 그 속을 파낸 바가지를 일컫는 뒤웅박의 방언이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이 왜 그렇게 시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됨박에다 송진을 진하게 바르니 새카만 큰 공처럼 보였다.

그리고 부인은 마을의 힘센 장정들에게 무쇠를 녹여 됨박처럼 만들고 검게 칠하도록 했다.

임진년 왜군들이 쳐들어왔다. 양전리도 무사할 수 없었다.

부인은 됨박과 무쇠 됨박을 마을 앞길에 길게 늘어놓았다. 왜군들이 무쇠 됨박을 보고 이상히 여겨 들어보려고 했지만 들 수 없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됨박을 들고 일제히 고함치게 했다. 고함 소리에 놀란 왜군들은 됨박을 한 손에 들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다. 꿈적도 않던 무쇠 됨박을 마을 사람들은 한 손에 들고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의 지혜로 앙전리 마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고 왜군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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