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6) 2·28 대구 학생의거

대구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구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도 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정부라도 정의롭지 않으면 싸웠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회 부위원장 이대우가 조회단에 올라가 전교생에게 목청 터지게 외친 결의문이다.

이승만은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국제학 박사까지 딴 수재다. 일제강점기 때는 항일 운동도 하고 종전이 되고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의 도발을 물리친 지도자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하면서 그는 차츰 시시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952년에는 '발췌 개헌'을,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을 했다. 1958년에는 진보적 정치인을 사형한다. 이 대통령의 이런 행동은 그 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게서도 똑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훌륭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군부가 물러서면 싸움꾼이었던 그들도 물러나야 한다. 싸움이 끝났는데도 욕심을 부려 링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투사들이 정치가로 변모해 나라 경영까지 해보려다 추한 꼴을 보이게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헌 부대에 담으면 가죽이 터지고 술이 다 새어 나가게 된다.

1960년 3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한때 국부로까지 추앙받던 이승만은 이미 자신이 용도 폐기된 줄도 모르고 80세 고령에 또다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민심을 읽고 있었던 자유당에서는 순리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한 것도 알고 있었다. 안 되면 말아야 하는 것이 순리인데 어리석은 그들은 억지로 야욕을 채워 보려 온갖 힘을 쏟고 있었다.

섬 지역에서 투표함을 갖고 올 때 야당 표가 많으면 바다에 버리고 미리 정부에서 만들어 둔 투표함을 갖고 온다. 개표 때는 개표 종사원들이 야당 표를 무효로 하려고 붓두껍을 투표용지에 다시 찍어 만든 '쌍가락지 표', 손에 인주를 묻혀 문질러 만든 '빈대 표', 손가락마다 칠한 인주로 야당 표를 두드려 '피아노 표'를 만든다. 그리고 야당 표 뭉치의 겉표지에 여당 표를 덧붙여 만든 '샌드위치 표'가 대표적인 개표 부정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이런 부정행위를 저지르고자 개표 중 항의하는 야당 참관인을 몰아내는 파렴치한 일을 벌이기도 했고, 아예 불을 끄고 부정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이런 일을 시키면서 돈을 주기도 했다. 어느 해 개표 때 불을 끄고 개표 종사원에게 돈뭉치를 주는 모습을 눈치 빠른 기자가 어둠을 향해 스트로보를 써서 찍은 사진도 있다. 요즘 개표장이 휘황찬란한 이유가 이런 아픈 역사의 결과이다.

자유당은 1960년 대선 시작부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1960년 2월 27일 토요일 대구 신천에서 자유당 유세가 있었다. 청중을 동원하면서 학생들도 끼워 넣었다. 중'고등학생들은 투표권도 없는데 동원령을 내린 걸 보면 만년 야당 도시였던 대구의 여야 대결 판세가 전국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하루 뒤 같은 장소에서 민주당의 유세가 예정돼 있어 그들의 조바심이 더했던 것 같다. 교사들은 양심을 팔고 제자들을 신천으로 몰았다. 학생들을 데리고 가면서 도중에 도망가지 못하게 거기서 출석을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고 만약에 현장에 결석하면 나중에 각오하라며 엄포를 놓았다.

자유당의 메인 연사는 황성수 의원이었다. 그는 교언영색으로 이승만 후보를 치켜세웠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속을 만도 했다. 하지만 대구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구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도 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정부라도 정의롭지 않으면 싸웠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 대항하는 주권수호운동이 시작됐다. 가난한 대한제국이 일본에 빚지는 바람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고 이 빚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됐다. 순종은 백성에게 김영삼 때 IMF사태와 같은 시련을 겪게 한 것이다. IMF사태 때 국민이 금반지를 모았듯이, 이때도 서상돈이 앞장서고 김광제와 박해령이 합심해 운동을 시작해 대구 사람들이 빚 갚을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2월에 시작해 4월이 되자 동조한 사람만 4만여 명에 이르렀고 돈은 230만원을 모았다. 국채보상운동은 후에 서울, 부산, 진남포, 진주까지 퍼져 나가 전국적인 항일운동의 시발이 됐다.

이런 대구 사람의 성질을 간과한 자유당은 안 그래도 토요일 강제 동원돼 화가 난 학생들에게 이번에는 일요일에 학교에 오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날은 민주당이 신천에서 유세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후보자 장면이 직접 온다고 하니 대구 사람들은 야당 도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자 너나없이 내일을 약속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중구 동인동의 경북고 학생 이대우의 집에는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속고 학생 8명이 모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내일을 기약했다. 28일 일요일 시내 각 중'고등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등교시켜 중학생들은 시험을 치르게 하거나 제식훈련을 시켰다. 어린 중학생들은 교사가 무서워 시키는 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은 교사들이 토끼 잡으러 가자는 곳도 있었고 영화 보러 가자는 학교도 있었다. 이대우는 영화 보러 가려고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준비된 결의문을 낭독했고, 그들은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내달았다. 이 시각 다른 고등학교도 일제히 교문을 밀치고 시내로 뛰쳐나왔다. 참여한 학교는 경북고, 경북대 사대부속고, 대구고, 대구상고, 대구농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 등 1천200여 명이었다. 그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경북고의 시위대는 대봉동에서 중앙통으로, 그리고 도청까지 계속됐다. 경북도지사는 학생들을 '공산당'이라고 했다. 경북도청에서 경찰과 맞닥뜨린 학생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120여 명이 연행되며 시위는 끝이 났다.

대구 고등학생들이 불의한 정부에 대해 일으킨 저항운동은 얼마 뒤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로 연결됐다. 그 후 서울에서 '4'18 고려대 시위'로 이어지고 '4'19혁명'에서 그 결실을 본다. 위대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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