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과 부정 그리고 부패가 극에 달했던 스페인의 18세기와 19세기를 살다간 프란시스 고야. 이 고독한 화가는 1799년 사회상을 풍자하는 판화집 '변덕'(Los Caprichos)을 펴냈다. 모두 여든 점 중 마흔세 번째 작품에는 이성을 의인화하고 있는 한 남자가 사유하기를 멈추고 책상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성이 잠에 빠지자 기분 나쁜 박쥐와 올빼미가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제 곧 괴물이 나타나 온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것이다. 고야의 이 판화 작품에는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라는 의미심장한 부제가 붙어 있다.
원래 예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고, 그 결과는 대부분 검열과 탄압이었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사회의 건강 상태를 측정해 주는 시약 역할을 해왔다. 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으면 대체로 미술가들에게는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고 미술가들의 비판적 목소리는 관대하게 수용되었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예술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문화강국'을 향해 달려가는 대한민국에는 국립미술관이 하나 있다. 1969년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덕수궁을 거쳐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했고, 2013년 옛 국군기무사령부 자리에 서울관을 개관했다.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미술관이 일상의 발길이 언제나 닿을 수 있는 생활공간 속으로 들어온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지난해 이맘때 인력채용 과정에서 불법적인 권력을 휘두른 관장이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났고, 새 관장을 선임하기 위해 적지 않은 홍역을 치렀다. 공모를 통해 최종 후보에 오른 인물에 대해 인사혁신처는 최종적으로 부적격 판정을 내리면서 전례 없는 재공모가 실시됐다. 1년 넘게 '선장' 없이 표류하던 미술관의 새 수장으로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 전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장이 낙점되었다. 정부 산하 문화예술기관의 최초 외국인 기관장의 탄생이다. 오는 14일 임명장을 받고 나면 3년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을 진두지휘한다. 과연 그는 한국 미술계의 '히딩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수장을 뽑는 과정에서 관(官)과 미술계 사이에 수많은 논쟁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도 바람직한 문화예술정책의 토양을 마련하고자 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앉히기 위한 정치적 공세와 내게 떨어질 '콩고물'에 대한 집착만 느껴질 뿐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도토리들은 키 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다람쥐들은 계속 쳇바퀴를 돌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술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모두가 유치한 '밥그릇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과감히 자신의 밥그릇을 찰 줄 아는 '돈키호테'가 무척이나 그리운 시절이다.
철학박사'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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