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년 전 국회에 출입하다 처음 만난 이분은 서울 토박이다. 그런 그가 총선을 앞두고 대구가 여론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내년 총선에서 대구의 판세가 어떻게 될지, 서울에서도 관심이 굉장하다는 것이었다.
이분을 차치하더라도 요즘 선거의 계절이 왔다는 점은 스마트폰만 봐도 알 수 있다. 조금도 쉬지 않고 울려댄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의 민심은 어떤지, 어떤 후보자가 더 유리한지, 이번에도 친박 마케팅이 유효할 것인지 등등. 대부분 지역민이 아닌 서울 사람들의 전화다.
실제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심판', '진실한 사람 선택' 등의 정치적인 발언은 대구경북(TK)을 전국적인 정치 핫이슈로 떠오르게 하는데 한몫을 했다. 여기에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 출신들이 유독 TK 지역에만 잇따라 총선 출마 행진을 하면서 흥행을 부추겼다.
언론들도 대거 대구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의 한 언론사는 기자를 3명이나 대구에 급파했다. 서문시장, 대학, 동성로 등지를 돌며 지역 민심을 체크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 신문지상을 통해 총선을 앞둔 대구의 분위기를 대서특필했다. 다른 서울의 언론들도 경쟁이나 하듯 대구 상황을 분석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필자와 친분이 있는 한 서울 기자는 "말로만 들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대구사람들의 충성도가 이렇게 높은 줄 몰랐다. 박심(朴心)을 실감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대구가 이처럼 총선의 중심지로 떠오른 적이 언제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히려 여당의 오랜 텃밭으로 인식되면서 지난 19대 총선 때는 TK가 전혀 주목받지 못했었다.
주목을 받는 동네가 아니다 보니 지역 국회의원들도 여의도에선 그리 대접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2013년 새누리당 연찬회 때 일이다. 19대 국회가 개원하고 처음 열린 연찬회에 초대받은 필자는 다소 황당한 경험을 했다. 뒤풀이 장소에 TK 의원들과 고향이 TK인 수도권 몇 명의 의원들이 모였다. 술이 몇 순배 돌다가 수도권 한 의원이 지역 의원들에게 농담 섞인 진담을 쏟아냈다. "우리는 불과 몇백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진짜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지만, TK는 얼마나 편하게 당선되는가. TK 의원들에게는 '임명직 공무원'이라는 닉네임도 있다더라."
다른 수도권 초선 의원은 지역 중진 의원에게 "수도권 초선은 TK의 3선과 급이 같다"라고 거들기도 했다. '선수(選數)가 깡패'인 국회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얘기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 발칙한 수도권 초선 의원에게 제대로 돌직구를 날리는 지역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이 같은 정서는 얼마 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경상도 국회의원은 동메달이고, 수도권 국회의원은 금메달이다'라는 발언과 맥을 같이한다. 일부에선 새누리당 내에서 보는 TK 의원들의 입지가 '동메달'을 넘어서 '목메달' 수준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모든 게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어디든 새누리당 공천만 받으면 빗자루를 세워도 당선된다는 곳이 대구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19대 총선 때 그런 현상이 가장 심했다. 당시에도 서울만 바라보는 후보자들에게 지역 유권자를 무시한다는 원성이 자자했지만, 공천자 명단이 발표되자 게임은 끝이 났다. 투표함은 열어보나마나였다. 이번에도 현재까지 벌어지는 상황은 지난 19대 총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 박심을 들먹이며, 친박 그룹에 속하기 위해 민심은 뒷전인 후보자들이 적잖게 보인다.
모처럼 선거의 계절에 대구가 주목받고 있다. 이번엔 제대로 된 관심을 받자. 공천이 사실상 당선을 의미하는 그동안의 공식에서 빨리 벗어나자. 박심보다 더 중요한 민심을 얻는 후보자를 여의도로 올려 보내자는 것이다. 그래야 '수도권 초선은 TK 3선과 급이 같다'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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