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첫 개인전(1921년 3월)에는 5천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뛰어난 글재주로 가부장제 남성들의 이중적 행태를 고발하는 글을 발표할 때, 그녀는 더욱 빛났다. 3'1운동에 참가해 옥살이를 했고, 만주로 이주해선 의열단으로 거명될 정도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27년 6월부터 1년 6개월에 걸친 유럽 여행은 운명을 바꿔 놓았다.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사랑으로 이혼하면서,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소외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1934년 남성 중심의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혼고백서'로 또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야유 속에 수덕여관, 청운양로원, 시립자제원을 전전하다, 1949년 12월 10일 서울시립남부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관보에 기재된 날짜여서 실제 사망 일자는 확실치 않다. 무덤도 없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여성의 삶은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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