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끝을 어떻게 맺을까 고민하다가 한국 언론에서 거의 접해 보지 못했을 영불해협의 채널 제도(諸島)에 속하는 섬 중 하나인 이색적인 건지섬(Guernsey Island)을 소개하면서 하직인사를 하기로 했다.
건지섬은 영국에 사는 나로서도 피안의 섬 같은 이미지의 이색적인 면을 많이 가진 섬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꼭 가보고 싶었다. 알고 보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도 잘 몰라 이루지 못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크루즈 배를 타게 되는 행운을 잡아 가게 되었다. 포구로 접근하는 보트에서 본, 영국인들에게도 유명한 휴양지인 건지는 역시 명불허전이란 말처럼 휴양지의 모습이 완연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이국적인 흰색 집들이 올망졸망 늘어서 있었고, 포구는 요트와 보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늘어선 상점들도 건지가 영국령인데도 불구하고 영국 본토 상점들과는 달리 프랑스 상품과 기념품들이 주가 되어 영국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레스토랑도 프랑스 요리가 주였다. 여기에는 영국 요리보다 프랑스 요리가 더 훌륭하다는 이유 말고도 지리적,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우선 건지섬은 프랑스 해안에서 50㎞, 영국 해안에서는 120㎞ 떨어져 있어 사실 프랑스에 훨씬 더 가깝다. 주민들도 프랑스 말이 더 익숙한 주민들이 많다.
건지가 원래 프랑스 소속이었다는 이유도 있다. 사실 건지를 영국이 소유하게 된 데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이던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쳐들어 와 정복했다. '고백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가 후사 없이 죽자, 자신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들고서 말이다. 비록 이렇게 잉글랜드가 프랑스인에게 정복되었지만 후세 왕들은 점차 영국인이 되었고, 그래서 프랑스 내의 영지들은 영국 소유가 되었다. 이후 영국 왕들이 줄줄이 프랑스 귀족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들이 결혼지참금으로 당시 최고의 재화였던 포도주로 유명한 보르도를 비롯해 프랑스 내의 알짜배기 땅을 들고 왔다. 그 결과 프랑스 내 영국 왕 땅이 프랑스 왕의 것보다 더 넓어졌다. 프랑스가 이 땅들을 회복하기 위해 백년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말기에 시골 농부의 딸 잔 다르크가 등장해 프랑스 불멸의 호국 영웅이 된 바로 그 전쟁이다. 당시 윌리엄의 영지였던 건지섬도 이때 영국령이 되었다.
이렇게 영국령이 된 건지는 영국 여권을 사용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영국 땅도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아주 생소한'왕실 속령'(Crown Dependencies)이라는 이상한 제도 때문이다. 왕실 속령에 속하는 섬에는 채널 제도의 저지섬도 있고, 아일랜드 해협의 만섬도 있다. 이런 왕실 속령 섬들은 법도 영국법과 다르고 화폐의 모양도 영국 파운드와 다르다. 화폐 가치는 같을지라도. 세금 제도도 달라 기업 법인세가 없고 대신 매출액에 상관없이 일정 금액의 회사 등록비만 받는다. 그래서 유럽 기업들은 물론 약삭빠른 영국 회사들마저 서류상으로만 본사를 이런 섬에 등록한다. 그냥 병합을 시켰으면 끝날 일을 굳이 복잡하게 왕실 소유라는 이상한 형식으로 놔 두었다. 모든 것을 복잡하고 별나게 하는 영국인들이라고는 하나, 자신들에게 들어올 거액의 세금이 눈앞에서 엄연히 빠져나가는데도 역사적인 이유로 그냥 두었다. 영국인들의 이런 심리를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해서 결국 법인세를 대신한 회사 등록비는 관광과 함께 왕실 속령 섬들의 주된 수입원이 된다.
이제 건지와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다.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을 쓴 위고를 좀 아는 사람들에게 건지는 대단히 익숙한 이름이다. 2012년 영화로 다시 소개되어 더욱 친숙해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레미제라블을 위고가 건지에서 완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왕이던 나폴레옹 3세를 거슬러 쫓겨나다시피 몸을 벨기에로 피한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저지섬을 거쳐 건지까지 거처를 옮긴다. 결국 망명 8년 만에, 나폴레옹 3세는 위고가 해외에 있어서 더욱 인기가 높아진다는 점을 염려, 국내로 들어오게 해 입을 막을 목적으로 귀국을 허용한다. 왕의 의도를 간파한 위고는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자의 반 타의 반의 건지 거주를 고집해 결국 건지에서만 11년을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건지에는 수도 없는 위고와 관련한 유적들이 남아 있어서 위고를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다.
특히 위고가 직접 짓다시피 한 오트빌 하우스는 그중 가장 중심이다. 프랑스가 멀리 보이는 언덕 위의 집은 위고가 곳곳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듯이 위고의 각고의 작품이다. 1층부터 3층까지의 각 방은 화려하다는 단순한 말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위고는 이렇게 온갖 정성과 돈을 들여 지은 방들을 놔두고 옥상에 옥탑방을 지어 거기에 거주한다. 위고는 옥탑방을, 특히 당시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장으로 지어져서 충격과 함께 유행을 일으켰던, 유리 온실 형태로 지었다. 이를 위고는 런던 박람회장과 같은 이름의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위고는 먹고 자고 글을 썼다. 위고의 침실은 천으로 만든 딱딱하고 거친 3인용 소파의자 침대가 들어가면 가로로 꽉 차고, 길이는 서울 지하철의 딱 4분의 1만 하다. 그 소파 침대마저도 다 닳아서 군데군데 보기 싫게 허옇게 해졌고 실밥이 여기저기 보였다. 도저히 거부인 대문호의 침실이라고 할 수가 없다. 흡사 수도원의 수사 같은 생활에 자신을 몰아 넣은 듯하다. 수정궁 한구석에는 책상이랄 수도 없는 그냥 판자 하나가 연단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 위고는 서서 연설을 하는 듯한 자세로 레미제라블의 원고를 썼다.
그 탁자를 보고 난 후에 레미제라블을 다시 보니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혁명의 사자후가 흡사 위고가 하는 말처럼 들려 마음이 짠했다. 고향을 앞에 두고 못 돌아가는, 혹은 안 돌아가는 위고의 모습이 해외에서의 세월이 이제 고국에서의 세월보다 더 길어진 내 모습 같기도 해서이다.
다시 한 번 졸고를 읽어 주신 독자님들과 고향 독자들을 만나게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매일신문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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