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지천사에서 쉼 없이 달려왔던 길 아니던가. 그러나 마지막 고비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미숭산. 이 산만 넘으면 합천군 야로면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도 미숭산(해발 733.5m) 전투에서 발길을 돌렸던 곳이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드디어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미숭산 정상에 다다랐다. 탁 트인 전망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북으로는 저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 이제 합천 해인사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우륵의 숨결이 흐르는 가얏고 마을
팔만대장경 경판을 옮기는 것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대가야읍에서 3일을 지체했다. 때아닌 가을장마를 만났다. 팔만대장경 경판이 비에 젖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비가 그칠 때까지 대가야읍에서 머물렀다. 3일이 지나 쾌청한 가을 하늘이 햇볕을 머금고 회천 강물에 반짝인다.
환암대사는 서둘러 대가야읍을 출발했다.
대가야읍을 지나 쾌빈리에 당도했다. 쾌빈리에는 1천500여 년 전 악성(樂聖) 우륵의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가얏고마을이 있다. 쾌빈리 가얏고마을의 옛 지명은 정정골로서 이곳은 우륵이 가야금을 만든 장소다. 우륵은 가실왕의 명으로 가야금을 만든 후 많은 악곡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우륵은 대가야읍 쾌빈리의 한마을에 살았는데,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할 때에는 산골에 그 소리가 정정하게 울렸다 하여 그곳을 정정골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야금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금곡(琴谷)이라고도 한다.
가얏고마을은 국내 유일의 가야금 전문 박물관인 우륵박물관과 우륵기념탑, 우륵 생가 등 가야금을 테마로 한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정정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맞은 편 야트막한 산 정상에는 우륵기념탑과 우륵영정각이 세워져 있다.
쾌빈리를 거쳐 미숭산 아래인 신리(新里)에 도착했다. 신리는 대가야의 도설지왕(道設智王)과 월광태자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신리의 옛 지명은 옥담, 옥담마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 때 명장 이사부(異斯夫)가 정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대가야국을 급습했다.
대가야국의 도설지왕을 비롯한 신하와 많은 왕족들이 이 마을에 피란 와서 하룻밤을 묵었다. 왕은 옥대가 등에 걸려 풀어놓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신라군이 이곳에까지 쳐들어오자 경황 중에 옥대를 매지 않고 피란길에 올랐다고 하여 훗날 이 마을의 이름을 옥담이라 이르게 됐다.
그리고 옥잠(玉蠶)리라고도 한다. 대가야국이 신라의 침입으로 망하게 되자 도설지왕을 비롯한 많은 왕족과 궁녀들이 피란길에 올라 이곳에 이르렀다. 이들은 망해가는 나라의 국운 앞에 머리를 단장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비장한 결의의 표시로 비녀를 풀어 떨어뜨리고 갔다. 후일 사람들이 이 신리 일대를 옥잠이라 부르게 됐다.
환암대사는 신리에서 잠시 여장을 풀고 쉬어 가기로 했다.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이 미숭산을 넘기 위해서는 지친 몸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성계도 발길을 돌린 미숭산
신리를 벗어나면서 미숭산 입구로 접어들었다. 고령군과 합천군 야로면 경계에 위치한 미숭산은 북쪽으로 사월봉, 북서쪽으로 문수봉, 동쪽으로 주산과 연결된다.
미숭산은 고려 말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 장군이 고려를 되찾기 위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맞서 성을 쌓고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상원산(上元山)이었으나 장군의 절개를 기리어 미숭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고려 충목왕 2년(1346년)에 태어났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혀 안동장군에 이르렀으나, 국운이 쇠퇴하자 고려 재건을 위해 진서장군 최신과 함께 미숭산을 근거지로 이성계에 항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절벽에서 투신해 순절했다. 그의 절개와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름 지은 곳이 순사암이다. 순사암 북쪽 암반에 '여주이공휘미숭자정지지'라 새긴 각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미숭산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산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지금은 임도를 잘 정비해서 미숭산 중턱까지는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다.
미숭산을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 산기슭에 고령군이 조성해 놓은 미숭산자연휴양림과 대가야 고령 생태 숲이 있다.
미숭산자연휴양림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몸을 울창한 숲에서 제대로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고령 신리마을 인근에 위치한 이곳은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았다. 이곳은 초록의 쉼터요, 산림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녹색 의사이며, 좋은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휴양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미숭산자연휴양림은 해발 300여m에 위치해 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조성됐다. 게다가 휴양림 인근에 조성된 대가야 고령 생태 숲에서는 숲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와 기능을 알려주고 자연을 체험할 수 있다. 인근에 자작나무숲 길도 만들어져 있다.
생태 숲에는 생태 숲 학습장과 숲속교실, 숲테라피원, 그늘 숲 등이 있어 여름에 더없이 좋은 휴식처다.
◆고행의 미숭산 오르는 길
대가야 고령 생태 숲에서 1㎞가량 올라가면 나상현 고개다. 고령군과 합천군으로 갈라지는 경계지점이다. 여기서 미숭산 정상까지는 1.8㎞를 더 올라가야 한다.
미숭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산세는 더욱 험해졌다. 좁은 오솔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잡목들이 발목을 휘감아 앞으로 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 있어 조심조심 한 걸음씩 옮긴다.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에 나선 승려들과 백성들의 숨은 이미 턱까지 차올랐다. 그냥 산을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경판을 이고 들고 산을 오르자니 이마에 맺힌 땀이 연신 발아래로 떨어진다.
천제단 앞을 지난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천제단 길은 간절한 기도를 하늘에 전하고자 하는 염원의 길이다. 평이하던 등산로가 천제단 길에서 고도를 높이면서 산객의 숨소리도 거칠어진다.
드디어 미숭산 정상에 올랐다.
탁 트인 정상에서 서쪽과 북쪽으로 보니 발아래로 합천군 야로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저 멀리 가야산도 보인다. 동쪽으로는 고령군 대가야읍 신리가 펼쳐져 있다.
미숭산 정상부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67호인 미숭산성(美崇山城)이 있다. 현재는 성터와 성문의 잔해가 남아 있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1천325m에 이르며 삼국시대에 축조돼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보축됐다. 산성 내에는 동문, 서문, 남문을 비롯해 갑옷과 칼을 묻었다는 갑검릉, 말을 달리던 주마대, 망향대, 달각암, 연병장, 순사암, 봉수대 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오르고 내리며, 좁아지고 넓어지는 숲길을 30여 분쯤 걸으면 반룡사(盤龍寺)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산자락에는 신라 문무왕 때 승려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반룡사가 있다.
능선길 아래 자리 잡은 천년고찰 반룡사는 크게 화려하지 않지만 아담한 풍광을 담은 절이다. 돌에 새겨진 절의 역사를 보면, 원효대사가 중창할 때 이곳 지세가 용이 서려 있는 듯해서 반룡사라고 이름 지었단다. 서기 802년 가야산 해인사를 지을 때 반룡사에서 주관했다는 설도 있고,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반룡사를 다치게 하지 마라'는 황제의 교지가 있었다고도 한다.
미숭산성 길 입구를 통과해 내려선다. 산 아래 합천종합야영수련원이 보인다.
◆미숭산 천제단의 분노
이곳에는 가뭄이 심하면 주민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다. 또한 큰 자연재해가 있으면 이곳에서 하늘에 제를 올렸다.
신령한 곳으로 여겨진 이 일대에 묘를 쓰면 천제단의 분노가 있었다고 한다. 그 분노로 인해 700리 안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미숭산 기슭에 접해 있는 마을 청장년들이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거나 온갖 재앙이 일어난다는 속설이 전해내려 온다.
그래서 이 마을 주민들은 천제단 근처에는 아예 조상 묘를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써 둔 조상 묘는 이장했다.
1970년대 큰 가뭄이 있었을 때 주민들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천제단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천제단 바로 곁에 묘를 쓴지 며칠 지나지 않은 묘 하나가 있었다. 봉분의 흙에는 수분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분개했다. 우선 제를 올린 후 묘를 파헤치자고 의견을 모았다. 청솔가지를 산더미처럼 쌓고 불을 붙였다. 불기둥과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제를 올린 후 주민들은 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 구름이 마을을 뒤덮더니 애타게 기다리던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 충분하게 내린 비로 무사히 모내기를 마친 주민들은 수소문한 끝에 묘를 쓴 사람을 찾아냈다. 묘를 쓴 사람은 대구에 있는 사람인데 몇 년 전부터 집안에 크고 작은 재앙이 그치지 않아 소문난 무당을 찾아 물어보니 미숭산 천제단 근처에 묘를 쓰면 잘 풀릴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용서를 빌고 곧바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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