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독일의 추억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하다. 인천공항이 아직 지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바닥에 바퀴 달린 검은색 이민 가방 하나 달랑 끌고 김포공항을 통해 올랐던 유학길.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로 떠났다. 지금이야 흔해빠진 것이 조기유학이지만, 그때만 해도 학부 졸업장도 없이 유학을 떠난다는 건 재벌 집 자제들의 호화판 해외 도피이거나 인생을 건 무모한 도박이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마중 나온 독일인의 차를 타고 처음으로 달렸던 아우토반. 아우토반에는 정말 속도 제한이 없냐고, 지금 생각하면 뻔하고 뻔한 질문을, 뭐 그리 심각하게도 던졌던지.

처음 몇 개월간 네덜란드 국경지역 어느 시골의 기숙학교에 머물며 독일어 시험을 준비했다.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국경에 무의식적으로 신비감을 부여한 모양이다. 물을 건너지 않고 말이 다른 외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잘 실감나지 않았다. 말이 다른 것도 아닌데 하나의 민족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철망의 존재감. 국경은 위험에 대한 경고이며, 결코 넘어서도 안 되는 금지된 선이기 때문에 두 다리를 가위처럼 벌려 독일과 네덜란드 두 나라에 합법적으로 양다리를 걸칠 수 있다는 것이 조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흔히 독일하면 맥주, 감자, 소시지 그리고 우울한 날씨를 꼽는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독일 날씨가 항상 우울할 것이라는 생각은 5월부터 시작되는 여름시즌의 독일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해마다 3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서머타임이 시작되면 낮의 길이가 부쩍 늘어난다. 해가 쨍하다 갑자기 폭설이 내릴 만큼 'April, der macht, was er will'(제 멋대로인 4월)이 지나 5월이 되면 유럽의 강렬한 태양은 말 그대로 식을 줄 모른다. 중북부 독일만 해도 제법 위도가 높기 때문에 여름에는 거의 오후 11시나 되어야 해가 기울어진다. 짙은 녹음이 도시에 깔리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들 자리를 깔고 일광욕을 즐긴다. 이들에게 검붉게 그을린 피부는 햇살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음에 대한 일종의 '과시'이다. 한여름 뙤약볕에 그을릴세라 바르고 막고 피하는 우리네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9월이 중순을 향하면 그 뜨거웠던 태양이 식어 버리고 순식간에 악명 높은 독일의 우중충한 날씨가 엄습한다. 오후 4시만 되면 어둑해지는 거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촉촉이 젖어 있는 골목길. 집집마다 아늑히 초를 밝히며 성탄을 준비한다. 차분히 깔린 대기가 벽난로 나무 타는 냄새를 조용히 실어 나른다. 향기는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이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