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눈을 뚫고서 들판을 걸어갈 때

백범 김구.
백범 김구.

눈을 뚫고서 들판을 걸어갈 때

이양연(李亮淵: 1771~1853)

눈을 뚫고 들판을 걸어갈 때

적당히 대충대충 걷지 말거라

오늘 아침 내가 걸은 이 발자취가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길이 되느니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朝我行迹(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원제: 野雪(야설: 들판 위의 눈)

백범 김구 선생이 엄청 좋아하여 줄곧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시다. 즐겨 붓으로도 쓰셨기 때문에 친필 글씨가 여러 점 남아 있기도 하다. 게다가 백범 글씨의 복사판들이 우리나라의 거실과 서재에 심심찮게 걸려 있는 바람에, 더욱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선생이 붓글씨를 쓰실 때 작자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백범이 지은 시로 잘못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기야 작품 속 화자의 실로 장대한 목소리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당당하게 정도를 걸었던 선생의 목소리와 아주 흡사하여, 착각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보다시피 시인은 '눈을 뚫고 들판을 걸어갈 때 대충대충 걷지 말라'고 말한다. 왜 그러냐고? 앞에 가는 사람이 대충대충 걸어가게 되면 뒤에 오는 사람이 바로 그 어지러운 발자국을 따라 걸어, 엉망진창의 삐뚤빼뚤 길이 생기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똑바로 걸어라. 똑바른 길이 생겨나도록. 눈 내린 들판 같은 인생길에서 춥다고 해서 얼렁뚱땅 살려고 하지 말고 제발 똑바로 살아가거라. 얼렁뚱땅 살게 되면 얼렁뚱땅 사는 사람들이 내 뒤에 줄을 잇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인생 제대로 살아라.

읽는 순간에 바로 이해가 되고, 이해와 함께 가슴에 쿵하고 큰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어디 똑바로 걷기 싫어 삐뚤빼뚤 게걸음을 걷겠는가? 똑바로 걸으려고 애를 썼는데도 결과적으로 게걸음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아주 작정을 하고 삐뚤빼뚤 걸을 리가 있겠는가? 나름대로는 똑바로 걷는다고 걸었는데, 지나고 나서 보면 삐뚤빼뚤 게걸음이 되어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결과가 그 모양일까?

"이놈 쟁기질하는 것이/ 뭐 그려/ 똑바로 해야지/ 꾸불꾸불한 이랑 좀 봐//아버지의 큰 목소리/ 귀에 쟁쟁 들리네/ 살아온 세월 뒤돌아보니/꾸불꾸불 엉망이네// 먼 곳을 봐야지/ 이랑이 똑바른 거여/ 코앞만 보고 쟁기질하니/ 저렇게 꾸불꾸불하지." 박운식 시인의 시 '쟁기'의 전문이다. 아아, 그러네. 저 머나먼 곳을 내다볼 줄 아는 원대한 시각을 갖추지 못하고, 코앞만 보고 걸어가다 보니 엉망진창이 되고 만 것이네. 엉망진창이 되지 않도록, 새해부터는 저 먼 곳을 내다보며 걸어야 되겠네. 그렇다고 해서 시궁창에 풍덩! 빠지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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