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포항 히스토리델링] <9>화려한 추억, 송도

포항운하로 살아난 송도 바닷가 '과거의 영광' 되찾을까

포항 송도 바닷가에는 추억이 많다.

푸르게 펼쳐진 솔밭에서는 사시사철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뒤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얀 백사장이 바스락거렸다. 끈적이지 않고 약한 바람에도 쉽게 흩어지는 모래다. 햇볕에 적당히 달궈진 모래를 맨발로 기분 좋게 느끼고 나면 잔잔한 동해바다가 더럽혀진 발을 씻겨준다.

까까머리 시절에는 가끔 백사장에 앉아 친구들과 맛도 모르는 소주를 나눴다. 그러다 흥이 돌면 여자든 남자든, 이성의 무리를 찾아가 괜한 수작질을 건네기도 했다. 모두 햇살을 닮은 하얗고 부드러운 추억들이다.

물론 지금의 송도 바닷가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백사장도 좁고 비릿하기만 한 바닷가가 뭐 그리 좋냐고 타박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분명 포항에서 자라난 기성세대들에게 송도는 추억의 이름이다.

학창시절 한 번쯤 송도 솔밭에서 가을 소풍을 지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너른 백사장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한 여름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겨울이면 함께 손을 맞잡고 체온을 나누던, 풋풋한 첫사랑의 흔적이 아직 송도 바닷가에는 남아 있다.

◆자그마한 외딴 섬

포항에는 유난히 섬 '도'(島)자가 들어간 동네 이름이 많다. 포스코가 들어서며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섬에서 육지가 된 곳들이다. 그러니 송도(松島)라는 이름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이곳 역시 원래 육지가 아닌 섬이었다.

과거 송도동은 동쪽으로 송도해수욕장을, 서쪽으로 송도교 밑을 흐르는 형산강 지류를, 남쪽으로 형산교 아래를 흐르는 형산강 하류를, 북쪽으로 항구동 내항을 경계로 4면이 바닷물과 강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때문에 포항에서 가장 늦게 마을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송도는 이름없는 무인도였다가 1832년 조선 후기 때 영일현 읍내면 송정리에 소속됐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다가 1800년대 말부터 송정리 사람들이 이곳을 개척하면서 서서히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이 실시돼 영일군 동면에서 영일군 대정면 송정2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고, 1917년 포항면으로 또다시 행정구역이 옮겨졌다. 이때쯤 송도동은 이미 약 20가구가 들어설 정도로 꽤 규모가 커졌다. 이어 1931년 송도읍으로 승격됐을 때는 약 70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송도동에서는 형산강 개수공사가 시작됐으며 1935년 형산교가 들어서자 어느 정도 육지의 모습을 갖췄다. 행정구역 또한 완전히 분리돼 포항읍 향도동이란 명칭의 새 마을로 발전했다. 해방이 된 1945년에는 마을 이름이 일제식이라고 해서 지금의 송도동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송도라는 이름은 1910년쯤 한 주민이 소를 먹이기 위해 방품림으로 해풍에 강한 측백나무와 해송을 심기 시작해 1930년대부터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면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송도는 마을이 형성되면서 가운데 큰길을 중심으로 남쪽마을을 웃각단(현재 주민센터와 송도중학교 사이 지역), 북쪽 마을을 아랫각단(옛날 우물이 있었던 곳)이라 불렀다. 나중에 웃각단을 송도 1구지역, 아랫각단을 송도 2구지역으로 구분해 동행정을 보게 했다고 전해진다.

1900년대 초기 웃각단에는 영일 정씨를 비롯해 7, 8가구가, 아랫각단에는 김해 김씨와 순흥 안씨를 중심으로 10가구 정도가 거주했다. 이들은 주로 조개잡이 등 어업활동과 밭농사로 생활을 영위했다. 밭농사는 주로 작은 땅에 참외나 수박 등을 재배하거나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는 호밀, 보리 등을 갈았다.

특히 송도동이 동해안 염전의 제1생산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시대부터 소금을 많이 구웠다고 해서 염동곡(鹽東谷) 또는 염동골이라는 별칭이 있었을 정도다. 이곳의 소금은 특품으로 왕에게까지 진상됐다. 그러나 이후 간척사업이 진행되며 많은 수의 염전이 수몰되고 생산단가에서조차 서해안의 소금에 밀리며 1950년쯤 송도 염전시대는 막을 내렸다.

◆일제가 남긴 소나무숲

포항의 젖줄인 형산강은 송도동에 이르러 바다와 만난다. 강의 민물과 바닷물이 함께 어울려(조경수역) 청어와 정어리 등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송도이다. 이 때문에 한일합방 이후 송도 역시 일제의 수탈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송도동의 울창한 솔밭은 일제가 남긴 긍정적 잔여물이다. 1911년 일본인 오우치 지로(大內治郞)가 포항에 정착하면서 기존에 듬성듬성하던 소나무숲을 본격적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포항에서 시금치 등의 농사로 큰 부를 쌓은 그는 지역에서 가장 많은 농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당시 오우치 지로는 송도 일대 국유지 53여 정보(町步'1정보는 3천 평으로 지금의 약 9천900㎡)를 총독부로부터 불하받아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거센 바닷바람으로 농사에 어려움을 겪자 바람막이용 숲을 조성하기 위해 해송을 가져다 심었다. 그는 더욱 단단히 뿌리를 잡게 어린 묘목 주위에 찰흙을 깔고, 직접 육지에서 물을 길어와 뿌리는 등 조림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그렇게 십수 년이 지나 송도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번졌다.

이 소나무숲은 1929년 어부보안림(魚付保安林'해류가 급하지 않고 간만의 차가 적은 해안에서 어류 보호에 필요하다고 인정돼 산림법에 의해 보안림으로 지정된 산림)으로 지정됐고 포항 8경 중 하나로 꼽히며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송도 송림을 가꾼 오우치 지로는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자신이 가꾼 소나무숲을 잊지 못해 죽기 직전 "송도 소나무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일화가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산업화의 뒤편으로 사라진 해수욕장

송도동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수욕장이다. 송도해수욕장은 평평한 백사장이 마치 기러기가 짝을 지어 평화롭게 내려앉은 모습 같다고 해서 조선시대 때부터 '평보낙안'(平沙落雁)이라 불렸던 명승지다. 송림을 지나 곧바로 쭉 뻗은 백사장은 한때 총 길이 3.2㎞, 평균 너비 70m의 넓은 평지에 곱고 새하얀 모래가 가득했던 곳이다. 또한 물이 맑고 조석간만의 차가 적으며 멀리까지 수심이 얕아 해수욕장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송도 백사장은 최적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방치돼 오다 포항면이 읍으로 승격된 해인 1931년 처음 개장했다. 이후 여러 시설이 들어서고 제대로 된 해수욕장의 모습을 갖추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피서철인 여름이면 해마다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한 해 최고 20만 명에 가까운 피서객이 찾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1983년 송도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며 북한의 원산해수욕장과 함께 당시 동해안 최고의 피서지로 각광 받았다. 1958년 배우 최은희가 열연했던 영화 '형제'와 1998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파란대문' 등은 한때 찬란했던 송도해수욕장과 송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기록들이다.

이처럼 빛나던 송도해수욕장의 위용은 현재 아쉽게도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1968년 이곳에 포항제철 등 철강산업단지가 들어서며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바다가 매립되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백사장의 고운 모래는 점점 파도에 쓸려 떠내려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0년대 말 두 차례나 불어닥친 태풍은 송도의 백사장을 움푹 파인 꼴로 만들었다. 한때 너비 70m에 달하던 백사장은 이때 겨우 2~8m만 남았다.

포항시는 백사장 복원을 위해 1979년 형산강 바닥의 갯벌을 퍼다가 송도해수욕장 13만㎡에 채웠으나 이것이 더 큰 패착이 됐다. 강바닥에서 썩어간 갯벌은 쓰레기와 함께 악취를 풍겼으며 피부병까지 번지게 했다. 당연히 피서객은 급속도로 줄어갔고 마지막 해수욕장 개장시기인 2006년에는 고작 4천여 명이 찾았을 만큼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송도해수욕장은 마침내 2007년 피서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고 문을 닫았다. 이때부터 송도 바닷가에서 해수욕은 물론이며 수상레저 역시 완전히 금지됐다. 해수욕장 주변에 늘어서 있던 횟집 등 상가들도 대부분 문을 닫고 겨우 20여 곳만이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처지였다.

◆옛 명성 되찾을까

지금도 포항 사람들은 과거 송도 바닷가의 반짝이던 백사장을 기억한다. 그만큼 송도는 포항 시민들의 향수와 추억이 어린 애정의 대상이다.

그런 포항 시민들에게 최근 들어 희소식이 들리고 있다. 폐가를 방불케 했던 송도 바닷가에 회생의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옛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송도해수욕장은 인근에 산책로가 깔리고 연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며 방문객 수가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다. 이러한 현상은 근래 급속도로 늘고 있는 커피전문점의 수로 증명된다. 포항시에 따르면 2012년 11곳에 불과했던 커피전문점 등 휴게음식점이 현재 20여 곳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일반음식점 역시 잇따라 창업하며 159곳에 이른다.

송도에 첫 회생의 불을 지핀 것은 포항운하였다. 형산강 입구에서 송도교 인근 동빈내항까지 1.3㎞ 구간에 물길을 뚫어 폭 15~26m, 수심 1.74m의 운하를 건설한 도심재생 프로젝트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물길을 따라 21t급 46인승 연안크루즈선박 1척과 16인승 관광유람선(리버크루즈) 4척이 운항되는 등 과거와는 다른 관광자원을 송도에 선사했다.

또한 2006년부터 시작된 송도해수욕장 연안정비사업은 하얀 백사장이 다시 살아날 꿈을 꾸게 한다. 국비 380억원이 투입되는 이번 사업은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한 수중 방파제 등을 설치하고 넓이 74만㎡, 길이 1.7㎞의 백사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도로 유실을 막기 위해 바닷가에 설치한 테트라포트 주위에 자연적으로 10여m의 모래가 퇴적된 사실이 확인되며 옛 모습 회복에 희망을 불러 일으킨다.

이와 함께 송도해수욕장과 영일대해수욕장을 잇는 다리도 건설 예정으로 있는 등 송도를 둘러싼 호재는 많이 남아 있다. 한때 경북을 넘어 우리나라 최고의 해양 관광지였던 송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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