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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7)팬 케이크

사령부 장교 식당에서 식사하던 어느 날 우연히 예의 그 흰 지짐을 만났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데서 이렇게 만나다니!' 굉장히 반가웠다. 이름도 그때 처음 알았다. 추억의 고향 음식을 미군부대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바로 그 맛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때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먹던 그 지짐.

매일 아침 등교할 때마다 집 앞길을 건넌 뒤에 '오늘은 왼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똑바로 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왼편은 빨리 갈 수 있어 좋은데 교통사고 난다고 어른들이 못 가게 하는 길이고, 바로 가는 길은 멀지만 안정된 길이라고 어른들이 권하는 길이었다. 나는 늘 왼편으로 가고 싶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은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왼쪽 길로 가면 경찰국장, 전매청장 그리고 도지사 관사가 있었다. 그 관사촌을 지나면 군부대(나중에 대구여고 자리)가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육군본부가 있었다. 이 길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시청, 관사촌, 군부대가 모여 있는 동네여서 온갖 모양의 차량이 줄지어 다녔다. 그런 커다란 장난감을 보는 게 너무 즐거웠다. 검고 큰 세단에서부터 '호루'를 벗기고 앞 창문을 내린 채 달리는 지프, 짐이나 군인을 가득 싣고 가는 트럭, 그리고 그 앞문에 매달려가는 헌병들, 차에는 노랗고 하얗고 , 검은 피부를 가진 군인들이 타고 있어 그림책을 보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군인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군했었다. 멋있어 보였다.

1950년 7월 9일부터 8월 30일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동네에 살았다. 피란 온 경무대가 조재천 경북도지사의 관사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어느 날 대통령이 산책 후 경무대에 돌아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손수 산 사과 몇 개를 건네면서 "이 사과 사다가 순사한테 잡혀갈 뻔했소"라고 말했다. 경찰관이 대통령을 잡아가다니? 사건의 경위인즉슨 이렇다. 여름이라 허름한 모시 적삼을 입고 중절모를 쓴 이 대통령이 시내를 다니다가 유명한 대구사과를 보고 몇 개를 사면서 주인 아낙네에게 한 개 더 끼워달라고 하자 그 여인이 "영감님!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 하면 순사가 잡아가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길 건너 똑바로 가면 왼편에는 101헌병대(나중에 16헌병대)가 있고 이어 대구여중이 나왔다. 오른쪽은 삼덕성당까지 부잣집이 줄지어 있었고 동네 뒤에는 법원과 검찰청이 있었다. 이 길은 경북대 부속중고와 국민학교, 대구상고, 경북중고, 대구중, 그리고 효성여대 학생들이 주로 다니고 차는 거의 없었다. 쭉 가다가 형무소 못미처 왼쪽으로 돌아 계속 가면 우리 학교 임시교사가 보였다. 차가 다니지 않으니까 추천 길이 된 것이다. 이 길은 볼 것이 없어 재미가 없었다. 한 번은 길 건너기 전에 있는 관음사에서 스님이 나와 그릇에 오줌을 누라고 해서 매우 놀라 도망 온 적도 있었다.

이 길의 장점은 길거리 음식이 있다는 점이다. 말이 거창해서 길거리 음식이지 전쟁 중 아이들의 싸구려 주전부리 음식이었다. 그렇고 그런 것들인데도 배고픈 시절이라 우리에게는 모두가 군침 도는 음식이었다. 해삼과 멍게를 파는 곳도 있었다. 아이들이 주문하면 아저씨가 즉석에서 해삼은 배를 가르고, 멍게는 튀어나온 두 개의 돌기를 잘라 내장을 파내고 나서 속살을 꺼내 줬다. 도마 위에는 핀을 펴서 만든 침이 꽂혀 있어 이를 이용해 해산물을 초장에 찍어 먹었다. 다 먹고 나면 주인은 아까 잘라둔 두 개의 멍게 돌기를 손님에게 준다. 하기야 그 속에 무슨 살이야 있을까마는 껍질과 함께 씹어 먹으면 별미였다. 긴 장대 양끝에 유리로 만든 상자를 메고 다니는 '기비당고'(수수단자) 장수도 있었다. 수수나 찹쌀로 단자를 만들고서 콩고물에 묻혀 꼬치에 꿰어 파는 일본식 간식이었다. 이런 유의 행상들은 그들의 상자에 망개떡이나 빵을 넣어 팔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 군음식 중에 나는 '흰 지짐'이 제일 좋았다. 당시에는 단순히 밀가루 지짐으로만 알고 그것을 사먹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길거리 좌판 할머니가 만들어 파는 그 지짐은 냄새가 향기롭고 맛은 고소하고 달달했다. 거기에 비하면 엄마표 밀가루 지짐은 아무 맛이 없는 단지 허기 해결용에 지나지 않았다.

빠른 길은 눈이 즐겁고 추천 길은 입이 즐거운 곳이었다. 어느 날부터 육군본부는 서울로 가고 그 자리에 2군사령부가 들어섰다. 그 많던 군인들과 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늘에 새카맣게 날아다니던 크고 작은 전투기, 폭격기, 수송기, 잠자리비행기도 뜸해졌다. 우리는 본교로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길이 조용하고 학교도 가까워져 아침마다 왼쪽 오른쪽을 따지는 철학적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시내가 기지촌(基地村)에서 사람 사는 동네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심심한 인생살이가 시작됐다. 맛있는 소시지나 햄도 먹지 못하고 향기로운 바둑 껌이나 초콜릿, 크래커도 못 먹게 됐다. 가끔 찡그리며 마시던 블랙커피와도 이별이었다. 모양도 맛도 없는 국산 과자를 보니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다. 길거리의 옛날 군음식이 그리웠다. 아무리 어머니를 채근해도 길거리의 그 지짐 맛을 내지 못했다. 미제로 간식하던 우리는 이제 단순하게 못사는 나라의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서 우리나라에도 육가공품이 나오고 맛있는 과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흰 지짐은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장성해 군인이 되어서는 서부전선에서 근무했다. 1960'70년대까지도 서부전선은 UN군이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UN군 중에서 '운천'의 태국군이 늦게까지 있다가 철수하고 미군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국군이 그 지역을 맡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근무할 때까지는 미군과 우리 군이 합동으로 서부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 부대 1군단은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가끔은 의정부의 한미 1군단 사령부에 가는 기회가 있었다. 그 사령부 장교 식당에서 식사하던 어느 날 우연히 예의 그 흰 지짐을 만났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데서 이렇게 만나다니!' 굉장히 반가웠다. 이름도 그때 처음 알았다. 추억의 고향 음식을 미군부대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바로 그 맛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때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먹던 그 지짐. 그리웠던 그 음식 그 맛, 그러나 그 지짐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팬 케이크라고 불리는 미국 음식이었다. 처녀인 줄 알고 한참 뜸들이다 보니 유부녀를 만난 격이었다. 그리도 그리던 음식을 만났건만 반가움은 어느새 까닭 없는 배신감으로 변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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