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동 24시 현장기록 119] 어느 봄날

목련꽃이 하얗게 피고 개나리가 피는 어느 따스한 봄날 저녁이었다. 평소처럼 소방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화재출동은 항상 방심하고 있는 사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조용한 밤이 되기를 바라고 아무 일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화재란 놈이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갑자기 스피커에서 "화재출동, 화재출동!"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때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화재 현장에 들어가는 것은 항상 두려움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현장은 바로 앞에 있는 내 손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숨소리만이 헉헉거리며 허공을 가를 뿐이다.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과도 닮아 있다. 많은 사람이 화재 현장에 있지만 정작 나 혼자만 있는 듯한 외로움이 어둠의 공포와 함께 밀려온다. 화재 현장은 아무리 좁은 곳이라 하더라도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기로 가득한 실내에서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순간과 자주 부딪힌다.

그날도 무사하기를 바라며 소방차에 올랐다. 항상 그렇지만 화재 현장까지 도착시간은 5분밖에 되지 않지만 느끼는 시간은 화재신고를 한 신고자 못지않게 마음이 타들어 간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면 대부분 신고자들이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한다. 우리는 그 신고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뭐라 말하지 못하고 현장으로 뛰어간다. 흔히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마음은 벌써 수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현장 상황은 어떨까? 화재가 어느 정도일까? 현장에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을까?'

화재 현장은 예측이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출동할 때마다 매번 상황이 다른 현장과 부딪힌다. 그래서 소방관들의 훈련 중에는 어둠 속에서 미로를 통과하는 훈련도 포함되어 있다. 미로의 문은 항상 다른 문으로 되어 있다. 앞으로 미는 문, 당기는 문, 옆으로 미는 문, 위로 올리는 문 등 모양도 같은 것이 없고 다양하다.

그날도 우리는 빌딩 화재라는 무전을 듣고 한층 더 긴장을 했다. 빌딩같이 넓은 실내공간은 요구조자를 찾기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면적이 넓어서 낮에도 찾기 힘든데 잘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연기까지 꽉 찬 화재 현장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연기만 가득하고 불꽃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가 더욱 진화에 어려움이 있다. 아예 불꽃이 보이면 그곳을 찾아가서 화재를 진압하면 되지만 보이지 않는 곳은 어디에서부터 화재가 시작되었는지 원점을 찾기가 힘이 든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곳에나 물을 뿌릴 수도 없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오히려 물로 인한 피해가 더 심각해질 수가 있다. 참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현장에는 벌써 도착한 대원들이 연기를 빼내기 위해 문을 파괴하고 있었다. 강화유리로 된 출입문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마침내 문을 파괴하고 현장에 들어갔지만 안은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다. 화재의 화점을 찾아 한참을 헤매고 다녔지만 불이 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통유리로 된 유리창을 제거하기로 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유리를 파괴하는 것은 많은 위험이 따른다. 파괴되는 파편으로 밑에 있는 사람도 위험하지만 파괴하는 사람도 굉장한 위험에 노출된다. 떨어진 유리는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아서 발에 떨어지면 크게 다치게 된다.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니 한층 시야가 밝아져서 불이 난 곳이 분명해진다. 화재를 위해 파괴된 문이나 창문을 보상하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창문 파괴로 난처한 상황이 될까 봐 망설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층별로 요구조자를 검색하며 다녔으나 다행히 빌딩에는 모두 퇴근해서 사람이 없었다. 고층빌딩 화재의 경우 최초 화재신고와 최초 발견자의 대응, 불법 주정차로 인한 소방출동로가 확보되지 않은 좁은 골목, 적정한 소방시설 관리 미흡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대형 재난이 발생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온 터라, 화재로 재산상의 손실은 있지만 인명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화재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봄내음이 물씬 나의 가슴속 깊이 휘감고, 나의 눈동자에 비치는 흰색 목련이 눈처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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