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적십자병원<3>-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이 노인은 가족들을 찾기 위해 온 시내를 다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자신은 노동으로 호구지책을 하다가 이제 늙고 병들어 이렇게 요양소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전쟁의 참화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 노인이 그러한 와중에도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자신의 일기를 갖고 와서 다소곳이 앉아 그 비극을 증언하는 모습은 더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야기 도중 간간히 일본 시청 공무원의 눈치를 보는 모습도 마음에 걸렸다. 손님이 올 때마다 불려 나와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증언해야 되는 저 신세야 말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쟁의 가슴 아픈 후유증이라고 생각되었다.

'평화의 길'에는 '평화공원'과 '우라카미 천주당', 그리고 '나가사키 의과대학'이 있다. 그 성당과 의대 건물 바로 위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으므로 그곳을 폭심지라고 부른다. 평화공원에는 커다란 남자가 손을 벌리고 앉아 있는 푸른 동상이 있었다.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상징하고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자폭탄의 위험을 가르치는 것을 상징한다고 했다. 무표정의 사나이 모습이지만 오히려 울고 짜고 하지 않는 그런 모습에서 더 비극을 느끼게 한 훌륭한 조각이었다.

그 공원 아래쪽에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이 있었다. 자료관에는 원자폭탄 '뚱뚱이'(팻 맨)의 실물대 모형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단지 모형에 지나지 않는데도 지금이라도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수업 받던 의과대학생들이 교실 바닥에 마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형체는 없고 그 무늬만 박혀 있는 사진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벽의 한쪽 구석에는 후폭풍과 고열 속에서도 우라카미성당의 종과 벽의 기둥 일부가 기적처럼 남아 전시되고 있었다. 그 성당의 신자 1만2천명 중 8천500명이 죽었다는데 그 난리 중에도 종과 벽이 남아 있는 기적은 신자들의 평화에 대한 지극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사진은 부모들도 죽고 없어진 6, 7세쯤의 남자 어린이가 죽은 동생을 등에 업고 화장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죽은 애는 축 늘어져 형의 등에 업혀 있고 형은 꼿꼿이 서서 이를 악물고 있다. 울지 않으려는 광경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자신도 그 후 죽었는지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아쉬운 일은 원폭에도 남아 있던 우라카미성당의 기둥을 원래 그 자리에 두었다면 그 기적적인 모습과 처참한 광경을 온 세계 사람들의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사키 사람들은 전쟁의 흔적이 보기 싫어 그 기둥을 자리를 옮겨 보관하는 바람에 원자탄 피해하면 단연코 히로시마의 돔이 유명하게 된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물, 물을 달라"고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실컷 물을 마시라고 자료관의 맨 아래 바닥에는 수많은 작은 분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일본, 미국, 우리나라 같은 나라라는 구별의 개념은 없어지고 다만 사람이 죽고 다친데 대한 무한한 설움과 슬픔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것이 아우성치지 않고도 인간의 슬픔을 크게 하는 예술의 큰 기능인 것 같았다.

공원의 한 구석에는 수많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이 속했던 직업권의 후배들이 세운 비석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비석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 하나 만든 우리 단체는 없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한 쪽 귀퉁이에 일본의 어떤 단체가 만들어 세운 한국인 위령 비석만이 외롭게 서있어 부끄럽고 화가 났다. 밉다면 일본이 미운 것이지 왜 죄 없이 이역에서 죽은 우리의 노동자가 홀대받는 것일까?

이렇게 현장 참관과 연수를 하던 중 대구적십자병원과 나가사키적십자병원의 자매결연식이 열린다는 전갈이 왔다. 2003년 9월 30일 아침 나가사키 의사회관 강당에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 그쪽 병원의 '신도원장'과 준비된 자매결연 협약서에 서명을 했다. 외국인과 문서에 사인을 하고 서로 주고받는 모습만 텔레비전에서 보다가 막상 주인공이 되고 보니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그 곳 텔레비전에서 그 모습을 다시 보니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조인식이 끝나고 옆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깜짝 놀랐다. 몇십 명이 모여 다과회나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커다란 강당에는 이미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내가 먼저 기념 축사를 했다. 이어서 나가사키병원장의 답사가 있었고 시장과 시의사회장, 원폭연구소 소장 등의 축사가 이어졌다. 나중에는 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만세 삼창을 하면서 의식은 끝이 났다. 그 후 양쪽 병원은 해마다 교대로 상대방을 초청하여 학술교류도 하고 특히 양쪽 병원의 관심사인 피폭자 진료와 인권에 대한 공동대책도 세우고 우호증진을 위한 프로그램도 짜게 되는 계기 되었다.

자매결연식은 끝났지만 남은 연수와 견학이 계속되었다. 좀 쉬엄쉬엄하자고 엄살을 부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융통성 없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끼리는 이야기를 했지만 초청받은 입장이니 어쩔 수 없이 하자는 대로 하고 지냈다. 연수의 끝 무렵에는 각자의 전공을 살려 견학을 따로따로 갔다. 견학과 교육 시에는 통역을 해주었는데 그런 것이 더 지루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어느 날 일과가 끝나고 우리는 나가사키만의 우측에 높이 솟아 있는 '이나사 산'에 올라갔다. 나가사키의 야경은 세계 3대 야경 중에 하나이다. 그 야경을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나사 산이라고 했다. 산 위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항구를 내려다보니 마치 수많은 보석을 박아 놓은 듯 불빛이 검은 산 그림자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밤바다에 그림자 지어 어른거리는 보석들,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감격을 느꼈다. 나가사키는 편편한 곳이 별로 없어 일반 주택은 거의 산에 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밤에는 예술을 만든다.

나가사키는 과거 쇄국 일본의 유일한 서양 창구였던 탓에 일본에서 처음이라는 음식과 건축물 등의 호칭이 많고 아직도 옛날 그 맛이나 멋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카스테라이다. 카스테라는 서양에서 들어온 음식인데 아직도 나가사키 카스테라 맛이 일본에서 최고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집이 세 곳 있는데 그 중에 원조는 복사원(우리말)이라는 곳으로 아직도 그 맛이 최고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짬뽕도 나가사키에 살던 중국인이 처음 개발했다. 중국 동족을 위해 음식점하던 중국인이 그 날 남은 재료를 한꺼번에 모두 넣어 만든 요리가 짬뽕의 시초라고 한다. 현재도 그 짬뽕 맛이 지속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흰 국물 짬뽕인데 숙주나물, 양배추 등의 채소가 듬뿍 얹혀 있고 국물이 우리 것보다는 훨씬 구수해서 맛이 있었다. 약간 짠 게 탈이지만 볶음밥과 함께 먹으면 짠맛도 줄이고 그 맛이 어울려 환상적이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토레디아호텔은 비즈니스호텔이라 아침 식사도 간단하고 방은 좁고 답답했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멀지 않아 아침에 산책하기 정말 좋은 곳이다. 호텔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유메사이토'라는 커다란 백화점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항구가 나온다.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건만 바닷물은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항구에서 바라보면 좌우가 산으로 둘러처져 있고 양 산 사이에 바닷물이 길쭉하게 골을 채우고 있다.

오페라 나비 부인에서 '쵸조'상이 자나 깨나 남편 '스핑톤'을 그리며 바라보던 그 바다가 바로 그곳일 것이다. '어느 날 수평선에 검은 연기를 올리며 그 배는 나타나고 이윽고 대포를 쏘며 항구에 나타나겠지'하는 노래 가사를 떠오르게 하는 바다이다. 푸치니가 나가사키를 와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페라에 묘사되는 나가사키에 관한 노랫말은 너무도 현장과 흡사하다.

연수의 막바지에 피폭자 노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요양원에도 갔다. 늙고 병들어 판단력과 기억력이 없어진 노인들은 항상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거기 노인들은 원폭의 피해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고 동정이 간다. 한 병실에서는 재활을 위한 각종 작업치료를 하고 있었다. 기운 없고 떨리는 손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환자도 짜증이 나고 간호하는 사람도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 병실에서는 환자도 작업요법사도 한 결 같이 웃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노인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것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형식적인 의례로 하는 인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못생긴 도자기를 한 개 주었다. 견학하러 간다고 빈손으로 갔는데 그 할머니는 나를 손님이라고 선물을 주었다. 이 요양원에서 고통 속에서도 웃으며 재활 치료의 어려움을 마다 않고 따르고 있는 노인네들을 보니 인간이란 이렇게 남을 비참하게도 하지만 또한 작은 일로도 이렇게 감동을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서재에는 아직도 그 할머니가 준 찌그러진 작은 도자기가 있다.

피폭자나 또는 일본 정부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원자폭탄은 미국이 터트린 것인데 왜 일본에서 우리에게 보상을 하고 우리를 교육시키는가 하고 자주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들의 속내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도 간단했다. "(원폭 덕에) 전쟁이 일찍 끝났잖아요?"라든가 아니면 "이기면 정의죠"라고 한다. 꼬치꼬치 더 묻고 싶지만 공인으로 갔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깊게 물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악물고 언제나 올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진 쪽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된다. 지고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욕을 하면 어리석고 비겁한 행동이라고 원망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한 속내를 결코 내색하지 않는 나가사키 시민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일본은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통이 커서 무서운 나라들이다. 쓸데 없이 입으로 떠들기보다 조용히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나가사키의대 부속병원 정신과에 견학을 갔을 때 주임교수는 홋카이도 대학에서 얼마 전에 왔다며 친절하고 진지하게 대해 주었다. 그 교수 말이 자신이 오기 전까지 이 대학에 교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아무리 작은 지방도시의 의과대학이라도 교수가 없었다니 말이다. 나중에 그 말을 다 듣고는 혼자 쓴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는 일반인이나 언론 모두가 전임강사이든 조교수든 대학에 근무하면 계급에 관계없이 다 교수라고 부른다. 어떤 경우는 시간강사로 출강해도 교수라고 부른다. 그런데 일본 언론 인터뷰 보도를 보면 반드시 그 선생의 직책이 그대로 소개가 된다. 이 대학도 교수가 없었다는 말은 선생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정교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 교수는 전공은 기분에 주로 장애가 오는 '정동장애'라고 했다. 나도 흥미가 있는 과목이 되어 그렇다면 치료는 정신분석을 주로 하는가 아니면 생물학적 치료를 주로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그는 생물학적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나 역시 박사 학위 논문이 그 쪽이 되어 한참 재미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을 떠나 온 지 오래된 사람인데 그 교수가 나보다 어떤 부분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속으로 일부러 멀리서 초빙해서 왔다는 교수의 알맹이가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순간적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나중에 오히려 나의 열등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일본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자신들의 의학을 갖고 있었다. 나는 미국 책을 달달 외워 전문의도 되고 학위도 받았기에 그 교수가 처음에는 나보다 못하다는 오해를 했다. 그러나 그 교수는 미국의학을 나보다 몰랐을 따름이고 자기 나라의 창조적인 깊은 학문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신과 의사들이 스스로 그렇게 똑똑하다고 떠들어 대지만 정신과 교과서에 올라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의사 노구치는 미국 정신과 책에 그 사진까지 크게 올라와 있다. 감염 병도 인간에게 정신병을 일으킬 수 있음을 뇌매독에서 증명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일본 의사들은 두 사람이나 노벨상을 받았다.

그 교수는 수인사와 소개말을 마치고 일본말을 더듬거리는 나를 위해 전공의 한 사람을 붙여 주었다. 그는 우리 교포 3세여서 능숙한 우리말로 의국의 공부 내용과 정신과 병실시설 및 치료 과정에 관한 것을 견학시키며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병실을 한 바퀴 돌고 대합실에 앉아 그제야 그 전공의와 가로 늦게 수인사를 하였다. 그 할아버지는 경북 문경 사람이라고 했고 아버지는 일본서 출생하였다고 했다. 나는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이네 하며 재일교포 3세인데 어떻게 우리말을 그렇게 잘하는가 물었다. 그 전공의는 자신이 조총련계 학교를 다닌 덕에 우리말을 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휴게실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부모들이 조총련계가 되어 한국에는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는 과거와 다르니 아무 걱정 없이 고향 방문을 한번 하라고 권하고 그 때는 반드시 나에게도 들러달라고 말했다.

이야기가 이데올로기에 이르자 그 전공의는 아까 그렇게 성실하고 싹싹하던 태도가 달라졌다. "국민을 못 먹여 살리는 김씨 왕조에 왜 그렇게 충성하는 거요?" 라고 물었다. "미국이 공화국을 에워싸고 봉쇄한 탓에 백성들이 못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난 자랑스럽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도 저렇게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다는 것은 남들은 뭐라고 해도 저는 가슴이 뿌듯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짧은 시간이나마 쌓였던 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이념에 관한 이야기는 그쯤에서 끝냈다. 나는 악수를 청하고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크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병실로 되돌아갔다. 그 사람은 고향 방문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떠나오기 전날 밤에는 공식 일정이 끝나 각자가 쉬며 자유 시간을 가졌다. 나는 명색이 단장이었고 또 그 동안 신세도 많이 지고해서 시청의 쿠사바 씨네 가족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사양하고 또 사양하는 걸 억지로 식당에서 만났다. 쿠사바씨는 일부러 싸구려 음식점에서 우리를 만났다. 그 집 가족은 부인과 딸 하나, 아들 둘이 있는데 막내만 데리고 나왔다. 식사가 끝나자 그 부인이 그냥 헤어지기 뭣하다며 집으로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자고 권한다. 좀처럼 손님을 집으로 부르지 않는 그들로서는 예외적인 접대였다.

차를 마시며 쿠사바 씨의 부인은 그 집 막내가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만 즐긴다고 우리 보고 좋은 충고 말씀 한마디를 청했다. 나는 아들이 하고 싶은 데로 두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쿠사바 씨는 '그럼 전문직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하면서 내 말을 아들에게 통역해 주지 않는다. 같이 갔던 딴 의사가 나를 대신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서울사람답게 싹싹한 말과 태도로 먼저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게임을 하라고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다. 그제야 쿠사바 씨는 얼굴이 밝아지면서 고맙다고 했다. 일본인에게는 욕과 농담이 별로 없다. 그런 탓에 우리가 하는 농담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런 풍습이 깔끔하고 좋게 보였지만 자주 일본을 가면서는 이런 것들이 인간미가 없어 보여 우리 취향에는 영 맞지가 않았다.

일본의 나가사키는 원자폭탄의 피폭지란 연유로 적십자끼리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나중에 대구적십자병원과 나가사키병원이 자매병원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6개의 적십자병원 중에 대구병원이 최초로 외국 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칭타오 홍십자병원에서도 일본처럼 자매병원을 맺고 싶은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사 타진이 왔다. 쾌히 승낙을 했다.

6. 칭타오 적십자병원

적십자 대구지사 직원들, 그리고 봉사원들과 함께 출국을 했다. 2005년 9월 8일 칭타오 비행장에 내렸다. 중국의 의전절차는 일본과는 많이 달랐다. 칭ㅌ오 비행장에는 일본과는 달리 그곳 적십자 직원들이 여럿 나와 있었다. 일본에는 사무적이고 딱딱했지만 여기서는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초면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악수를 하고 차에 올랐다. 일단 '헤이티안' 호텔로 안내가 되었다. 호텔은 크고 호화로웠다. 일본의 조그마했던 비즈니스호텔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크기였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호텔이 바로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에 산책하는 나에게는 알맞은 곳이었다.

다음 날부터 이곳저곳 견학을 다녔는데 같은 시내의 한 구라고 해도 굉장히 멀었다. 구와 구 사이가 멀어 우리나라 한 개의 도시와 딴 도시와의 간격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도시 구조도 그러했지만 그곳 사람들의 손님 접대하는 방식이나 스케일은 우리나라와 다르고 일본과 또 달랐다. 스케일이 컸다. 배정된 숙소도 비즈니스 급이 아닌 관광호텔이었고 어디를 가다가 끼니때가 되면 적당히 아무 곳에서 적당히 때우고 가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차를 몰아 커다란 음식점을 찾아간다. 점심인데도 풀코스로 음식이 나오는 식당을 갔다. 이렇게 점심을 거창하게 먹고 또 오후 견학을 갔다.

이번 칭타오 방문은 양쪽 병원의 자매결연이 주된 행사이고 나머지 견학은 방문 온 김에 가보는 정도여서 일행들은 견학에는 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어떤 날은 공장지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런 곳이 적십자 사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발전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자랑하고픈 의도가 숨겨져 있는 느낌이었다. 광활한 넓은 벌판에 자리 잡고 있는 공장들을 보니 시샘과 더불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바로 이웃에 우리와 같은 업종의 공장들이 이렇게 많고 같은 제품이 생산되는데 그럼 우리나라 공장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60, 70년대 우리나라를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활기를 띠고 있었다. 곳곳에서 헌집을 부시고 새집을 짓고 있었고 수출 컨테이너들은 항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통역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말을 아주 능숙하게 했다. 모두가 그 공업단지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원들인데 우리나라 교포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그쪽 말로 하자면 조선족들이었다. 우리나라에 품 팔러 온 가난한 조선족만 보다가 이렇게 대학을 나오고 잘생긴 조선족을 보니 같은 민족이라도 교육과 근무처에 따라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다른 데 놀라움이 앞섰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조국은 한국이요, 고국은 중국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확실히는 몰라도 양다리 걸친다는 뜻으로 들렸다. '만약에 우리가 못살았다면 자신들은 중국인들이라고 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들은 3대, 4대 전의 조상 때부터 중국에서 살며 우리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살았으니 한국이 뭐 그렇게 자신들의 나라라는 생각이 들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호텔 옆길을 건너 바닷가를 산책했다. 칭타오의 새벽 해변은 요란하다. 아침 산책길에 항상 처음으로 눈에 띄는 무리는 남자 노인들이다. 이 사람들은 각자 자전거를 타고 와서 약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간다. 이 사람들은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전거에 내려 길에서 바지를 벗고 내의 위에 수영복을 입고 모자는 쓰지 않고 물속으로 헤엄쳐 간다. 어느 정도 물속으로 들어가서는 10여 명이 둥글게 모여 발헤엄을 치며 서서 웃고 이야기를 한다. 그 부근에는 자그마한 드럼 통 두 개에 나무판자를 걸쳐 마치 옛 시골의 변소 모양의 배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취미인지 본업인지를 통 알 수가 없었다. 물고기를 잡아와서 갯벌에 널어놓은 걸 보면 크기도 각각이고 종류도 각각이어서 상품성도 없어 보였고 실제로 아무도 사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바닷길은 커브를 이루며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곳에는 낚시꾼들 십여 명 정도가 항상 나와 있다. 평일 새벽부터 여러 명이 낚시를 하는 광경도 눈에 익숙하지 않거니와 매일 이 낚시꾼들 뒤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 사람들은 직장도 없는 걸까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오십 분 쯤 걸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5'4공원과 음악공원이 잇달아 있다. 그곳은 나의 아침 산책의 반환점인데 넓고 바람이 많고 바로 옆이 시내의 중심지이다. 바람 탓인지 연 날리는 사람들이 많다. 일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돌아와야 시간을 맞출 수가 있다. 이 두 공원은 칭타오 시가 자랑하는 장소이다. 5'4운동은 우리나라 3'1운동과 흡사한 항일운동인데 우리와 같이 항일운동의 한 역사로 그들의 자랑이 늘어지는 곳이다. 나는 우리가 먼저 3월에 민중항쟁을 시작하는 걸 보고 중국에서 5월에 따랐다며 그들을 놀렸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음악공원은 정말 흥미가 있는 공원이다.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다가 어느 일요일 작정을 하고 그 모임을 자세하게 관찰을 했다.

커다란 뾰족 천막 모양의 베로 만든 천막 건축물 아래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 보통 날은 수십 명 정도가 모여 노래를 부르는데 일요일은 100명 가까이 모이고 악기를 가진 사람까지 찾아왔다. 호궁이 가장 많았고 기타, 하모니카까지 있었는데 때로는 바이올린, 첼로도 보였다. 아마도 각자 재능이 있는 것은 다 동원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 모였다 싶으면 지휘자가 나타난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가수 태진아 씨와 똑같았기 때문에 한참 혼자 웃었다.

원형의 천막 건물의 가운데는 둥근 기둥이 있는데 거기에 악보를 걸어 두었다. 악보에는 가사가 달려 있지만 우리가 보는 서양식의 그런 5음표는 아니고 숫자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가사는 칭타오를 자랑하는 내용, 자연경치를 칭찬하는 내용과 영웅들의 모험담들인데 한문 실력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지휘자와 합창단 그리고 악기 연주가 어울려 매일 아침에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는 나의 가슴도 뻥 뚫리게 해 기분이 좋았고 때로는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났다. 연주자들은 대개가 중늙은이들이었는데 그런 중에는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어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이 게 애국행사인지 취미 활동인지는 구별을 하지 못하겠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 공원에서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말로는 음악공원이라고 하지만 공원이 워낙에 넓은 탓에 운동하는 사람도 많은데 운동의 종류가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빙 둘러 서서 제기차기를 하는 무리들이 있고 또 우리 풍물패 같은 사람들이 중국 고유의 악기를 갖고 와서 요란하게 두들기고 불어댄다. 넓은 곳이니까 좀 떨어져 이런 놀이를 해도 될 텐데 하나 같이 합창하는 건물 옆에서 이런 운동과 연주를 한다. 노래 도중에 제기가 날아들고 풍물패의 연주가 노래패들의 소리를 방해를 한다. 나 같은 사람들의 성미로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분위기건만 이 사람들은 아무도 짜증을 내는 사람이 없다. 마치 바람이 그물을 스쳐가듯이 그들은 각자 제 할 일들에만 몰두한다. 감성이 무딘 것인지 아니면 대범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합창단 속으로 제기가 날아들면 화를 내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집어서 던져준다. 이게 대륙과 반도의 심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통역하는 교포 청년에게 물었다. "천안문에 모택동의 사진이 걸려 있던데 그곳에는 등소평의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오?" "그래요. 이치적으로는 그 말씀이 맞아요. 중국이 이렇게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강성대국이 된 것은 등소평의 공로이지요. 하지만 모택동이 없었으면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될 수 없었잖아요. 오늘날 사회주의인 중국은 저 사진을 뗄 수가 없죠. 만일 사진을 뗀다면 오늘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까요"라고 그는 대답했다.

칭타오는 독일의 지배도 받았었고 일본의 식민지 노릇도 한 탓에 동서양 문화가 섞여 있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런 풍습 중에 하나가 독일 식 맥주를 만들고 그것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긴 어느 나라든 맥주야 다 좋아하는 술이지만 이곳에는 좋아하는 방법이 특이하다. 가정에서 맥주 판매소에 가서 맥주를 사오는데 비닐봉지에 담아서 온다. 우리가 어릴 때 금붕어를 사면 비닐봉지에 물과 함께 고기를 넣어 주듯이 그런 식으로 맥주를 넣어서 판다. 시내도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중국과 서양의 정취를 한껏 보여주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그리고 거리를 걷다보면 벌거벗은 남자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보통 중국인들은 마작을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이곳에는 주로 카드놀이였다. 카드놀이도 그런 풍습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칭타오는 산둥반도에 있어 공자의 고향 곡부와 가까운 곳인데 이렇게도 아무 곳에서나 옷을 벗고 또 그런 차림으로 백주 대낮에 놀이를 하고 있으니 죽은 공자가 일어나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자못 궁금하였다.

아침 산책이 끝나면 호텔 부근에 있는 공중목욕탕을 찾아간다. 이곳은 값도 싸고 양쪽 나라말을 다 쓰는 종업원들이 많고 또 한국 돈도 받으므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목욕탕에 가면 수부의 남자 직원만 깨어 있고 대부분 직원들은 마루 여기저기에 흩어져 자고 있었다. 수부 직원은 돈을 받고 나면 안에다 대고 큰 소리로 "야! 손님 왔다."라고 북한 투의 말로 외친다. '손님 왔다가 뭐냐 손님 오셨다고 해야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탈의실로 간다. 총각으로 보이는 키 큰 종업원은 자다가 일어나 인사는커녕 하품을 하며 옷장 열쇠를 받아 문을 열어준다. 옷장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목욕탕은 우리나라 변두리 동네의 그것과 흡사한데 크기는 크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예의 그 키 큰 총각이 수건을 들고 와서 등을 훔쳐 준다. 다 필요 없는 행동이다. 나는 수건을 그에게서 빼앗아 스스로 물기를 닦았다. 매일 이러다 보니 안면이 익게 되고 대화도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20대 초반 교포인데 흑룡강에서 돈을 벌기 위해 왔다고 했다. 칭타오는 물산의 왕래가 풍부하여 중국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살고 있었다. 그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아직은 돈벌이가 안 되지만 숙식이 해결돼 우선 이렇게 지낸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도 중국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가 경북 경산에서 일제강점기 때 중국으로 왔다고 했다. 그 사람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도 전혀 세워 놓은 게 없었다. 공부도 못하고 궁벽한 시골에서 자란 탓에 남보다 나은 특기도 하나 없다. 늘 봐도 답답한 인간이었다.

사회주의에서는 인간이란 날 때는 능력의 차별 없이 태어나는데 어떤 가문에서 출생하느냐 등의 환경에 따라 그들의 앞날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즉 멍청한 사람이 따로 없고 그들의 환경 탓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이 착하고 무능하기만한 이 청년은 앞으로 어떻게 중국 정부가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일까? 짧은 중국 생활에서 아무리 봐도 똑똑한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지 어릿한 사람들은 호구지책마저 어렵게 살고 있었다. 가난은 공산당도 대책이 없어 보였다.

목욕탕 입구에서 손님을 받고 있는 청년은 아주 똘똘했다. 이 사람도 일제강점기 때 할아버지가 만주에 오는 탓에 조선족이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가 있는데 자신만 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만주의 봉천이나 신경(교포들은 중국 지명을 꼭 우리말로 부르고 우리만 엉터리 중국말 지명을 쓴다)을 이사 다니면서도 가첩을 버리지 않고 다녔기에 한국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했다. 그 덕에 아버지는 한국에서 취업이 가능했다고 한다. 가첩은 그 집안의 족보를 간단하게 정리해 놓은 책이다. 그냥 조상을 잊지 않는다는 일념 하나로 갖고 다닌 가첩이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트자 소위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 가첩이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 교포로 인정해 주어 쉽게 귀국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덕에 그 아들이 조국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첩이 있어도 그 손자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2005년 9월 9일 칭타오 홍십자병원과 대구적십자병원의 자매결연식 날이 왔다. 우리 일행은 아침에 홍십자병원에 도착을 했다. 병원 마당이 떠들썩했다. 병원 건물에는 대구적십자병원의 직원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마당에서는 스무 명쯤 되는 그들의 고유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붉은 옷을 입고 모여 있다가 우리가 도착하는 동시에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신이 나는 음악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며 박수를 쳐주자 연주자들은 크게 웃으며 더욱 더 요란하게 악기를 두드렸다. 홍십자병원 옆에 시립병원도 있었는데 크게 증축 중이었다.

원장은 양쪽 병원을 함께 운영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신축 병원 일이 더 큰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조인식에는 넥타이도 매지 않고 그냥 와서 그 자리에서 넥타이를 매었다. 조인식은 병원 홀에서 열렸는데 참석자는 우리나라 사람들 외에 그 쪽의 몇 명 안 되는 병원 직원들만 모였다. 양쪽 병원장이 간단한 축사를 한 뒤 그냥 도장만 찍고 식은 끝났다. 그리고 중국 쪽 원장은 그 자리에서 넥타이를 풀고 사라졌다. 그 사람은 정말 바쁜 것인지 아니면 이번 행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선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가 떠날 때 또 다시 그 풍물패들이 요란한 연주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를 푸대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이것이 중국 식인가보다 하고 더 깊이 따져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떠나오기 전날 밤 시내에서 큰 행사가 있었다. 호텔의 커다란 연회장에 송곳 세울 곳도 없이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은 대구와 칭타오가 자매도시 맺는 기념일이라고 해서 눈에 익은 대구시의 인사와 상공인들이 왔고 그 잔치에 우리 적십자직원들도 함께 참가를 하게 된 것이다. 모여든 사람 숫자와 공연의 가짓수도 많고 또한 규모가 커서 통역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왜 간단히 해도 될 기념식을 이렇게 요란하게 하는 거요?" "칭타오 공산당은 손님들에게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싶은가 봐요. 그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날아가는 비행기라도 땅에 착륙시킬 수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칭타오의 홍십자사 지사회장은 시청의 여러 부시장 중에 한 사람이었다. 시찰이나 견학을 갈 때 그 지사회장과 동행한 적도 있었는데 복잡한 시내를 갔을 때도 이 사람의 차는 망설이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 앞차를 추월했다. 그곳의 트럭들도 그런 식의 운전을 했는데 중국에서는 공산당원이거나 아니면 덩치가 크고 힘이 세면 다 그 사람들 뜻대로 되는 듯하였다. 중국은 왕과 지주가 사라진 자리에는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착취자와 독재자가 군림하고 있었다.

행사는 흥겹게 진행되고 있었다. 얼굴을 휙 돌릴 때마다 모양과 색깔이 변하는 놀라운 변검 놀이부터 혀가 내둘러지는 체조의 묘기대행진, 그리고 노래와 춤 등등. 이 날은 두 도시의 우호증진을 위한 모임이므로 중국 팀과 더불어 우리나라 팀의 행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못 보던 우리 고유의 음악이나 무용을 거기서 보았다. 남의 나라에서 봐서 그런지 엄숙하며 예술성 있는 우리 고유의 춤과 음악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칭타오에 유학 중인 우리 대학생들의 팝송연주와 풍물놀이도 선을 보였는데 아마추어 냄새가 물씬 났지만 그래서 더욱 자랑스러웠다. 공부하면서 저렇게 우리 것을 연습하여 남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자부심과 부지런함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날 기념식은 공산당들이 "썩어 빠졌다"며 욕하는 자본주의 그것들 보다 더 호사스럽고 웅장하게 행사를 끝마쳤다.

칭타오 시내 중심지에 가면 높은 빌딩들이 많다. 마치 도쿄이나 뉴욕에 와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나라의 도시와 다른 점은 빌딩 사이사이에 너무도 허름한 목조 건물들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이 초라한 건물들은 만두집, 세탁소, 음식점, 생선가게, 채소가게, 구멍가게 등등 너무나 정답고 친숙한 가게들이다. 내가 사회주의를 너무 이상적으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고층 빌딩과 초라한 가게들이 공존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어느 날 밤 혼자 골목 산책을 하던 중 만두 가게를 지나는데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리에 이끌려 그 가게로 들어갔다. 중학생만한 소년소녀들이 모여 만두를 빚으며 웃고 떠드는 소리다. 나는 그 청소년들이 그 집 아이들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들은 중국 각지에서 돈 벌러 온 청소년들이라고 했다. 국제연합에도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노동을 못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는 중국 공산당이 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객지에 돈 벌러 와서 철모르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모양은 좋게 보였지만 내 가슴은 아팠다.

짙은 화장을 하고 의자에 앉은 여자가 해바라기 씨를 질겅질겅 씹으며 껍질을 땅바닥으로 뱉어내고 있었다. 이 여자는 화류계 여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너무 험상궂었다. 그 여자는 빌딩 주인들에 대한 원망인지 아니면 자신 업소의 종업원들에 대한 불만인지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불만을 질겅질겅 씹어 재주도 좋게 땅바닥에 껍질만 뱉으며 밤을 지키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본산이라는 중국 칭타오의 뒷골목은 호화롭고 커다란 가게와 초라한 구멍가게가 대비된 비참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가진 자는 으스대며 살고 없는 자는 처량한 모습으로 기죽어 산다. 중국의 실정이 이러하지만 바깥세상을 알지 못하는 중국의 철모르는 소년소녀들은 그들이 착취당하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마냥 웃고 있다. 중국에서 며칠 숙식하며 본 새로운 이념인 공산주의 역시 인간이 창조한 엉터리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세상에 이상적인 이념은 실현되기 어려운가 보다 생각하며 칭타오를 떠나왔다.

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고 있는 중국, 막상 가보니 왕과 귀족은 없어지고 군벌과 재벌은 없어졌다고 하나 공산당이란 새로운 돈과 권력을 한꺼번에 가진 강자가 눈에 띄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새로운 주의는 없을까 생각하면서 서해바다를 넘어왔다.

7. 간첩.

서부전선의 임진강 보병부대에서 근무를 할 때 북쪽에서 북한군, 간첩, 그리고 게릴라들이 가끔 내려왔다. 이런 무리들 때문에 비상도 자주 걸렸다. 특히 추운 계절에는 짜증을 넘어 화도 많이 났다. 하여간 간첩이나 게릴라 등은 귀찮고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적십자병원에 근무하면서 간첩에 대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적십자병원에는 특수신분의 환자들이 많이 오는데 그 중에 '미전향 장기수'라고 해서 이북서 내려와 암약하다가 잡힌 간첩 출신들도 있었다. 이 분들은 나이가 대부분이 7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까지 있었는데 대구에는 10여 명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미혼이었다. 간첩이었던 이 분들을 '미전향 장기수'라고 흔히들 부르는데 사실은 그 말이 맞지가 않다. 사실은 전향 간첩들이다. 만약에 미 전향했다면 그들은 사형당해 살아남지를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전향이라는 용어는 좌파나 운동권에서 주로 쓰는 말인데 당시에는 공식 용어처럼 쓰였다. 그 용어의 뜻은 그들이 전향을 했지만 속으로는 전향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분들은 노인들이니까 가벼운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이 있었지만 건강상 크게 문제가 되는 병들은 없었다. 정신과 질환도 없었기 때문에 나와는 진료 때문에 만난 사람들은 없었다. 이 분들은 그들의 지병으로 평소에도 우리 병원에 오지만 전체적으로 오는 때는 일 년에 한 번씩 종합건강 검진을 하러 병원에 온다. 아침을 굶고 혈당이나 내시경 등 기타 검사를 하러 오기 때문에 검사가 끝나면 서비스로 늦은 아침을 대접했다. 병원 가까운 식당에서 나름대로 성의를 기울여 대접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 분들과는 그때 기탄없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이럴 때 속으로는 호감을 많이 느낀 것 같았다.

이 노인네들을 언뜻 보기에도 무언가 말투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북쪽에서 이미 엄선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죽다가 살아난 사람의 수양된 모습인지는 몰라도 말수도 적고 농축된 표현을 하며 깨끗하고 단순한 인간의 승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 분들은 전향하였기에 살아난 사람들로 죽기 싫어 스스로 전향했을 것인데도 자신들은 정부에서 술책을 써서 혹은 강압을 해서 원치 않는 전향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주장은 독방을 쓰는 사형수 방에 깡패를 넣어 송곳으로 찌르고 때리고 해서 전향시켰다고도 하고 혹은 어떤 조건을 내걸어 전향을 유도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아직도 이 사람들이 죽지 않고 굴욕을 참으며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지 아니면 그들의 정부를 배신한 비겁한 인간인지는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하지만 사는 건 좋은 일이었다. 살아서 과거를 묻지 않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념을 서로 강요하지 않고 식사를 하고 있으니 참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그분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나아가 무언가를 더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의 고위층까지 포함된 많은 얼치기 사회주의자, 감상론적 종북주의자들의 상스런 말투와 구역질나는 행동이 이들과 비교되어 더욱 이 늙은 진짜 공산주의자들이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우리 정부를 욕하고 배신하고 떠나 온 자신의 나라를 뻔뻔스럽게 치켜세우는 철없고 유치한 공산당 탈북자들과 또 그런 행동을 부추기는 얼치기 사회주의자와 종북주의자 등 이런 저질의 탈북자와 진짜 빨갱이 노인들을 비교해보니 같은 이념을 가졌어도 너무도 다른 말과 행동을 보였다. 인간의 애증의 기원은 사실 그 이념 때문이 아니고 그 인간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미전향수를 돕고 보호하고 그들을 대변해주는 시민단체가 있다. 그런 곳에 일하는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말도 되지도 않는 억지 이론을 펴면서 정작 당사자들은 조용히 참고 견뎌내고 있는데 그들이 괜히 입에 거품을 품고 난리를 떠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간첩이었던 이 노인들은 청춘의 나이로 남파된 뒤 계속 홀아비 생활을 하다 이제 노인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현재 삶이란 고작 숨만 쉬고 있을 따름이지 인간으로 누려야 할 기본 복지를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런 노년의 허전한 일부를 채워주고 싶었다. 잘 먹고 잘 살아도 노인의 삶이란 힘든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때까지 덜 외롭게 살도록 돕고 싶었다.

적십자 부녀회장을 만나 이런 뜻을 전하자 내 뜻을 잘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계획도 의논해 보았다. 그 분들을 자주 찾아가 말동무도 해주고 고독한 삶의 동무가 되어주는 것이다. 나중에 친해지면 일주일에 한번 정도 모시고 자동차로 나들이를 하면서 음식도 대접하는 계획을 세웠다. 다음에는 양심수 모임의 회장을 만났다. 이 분은 자주 우리 병원에 오는 분이다. 양심수 일 말고도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도 자주 진료를 받고 있다. 그 회장님도 좋다고 말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끼이면 억지로 모임이 진행될 것 같아 두 여자 회장님들을 따로따로 만나 일이 성사되도록 했다. 나중에 그 분들끼리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빠져 나와 그 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일은 예상과 달리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적십자 봉사단장 이야기가 자꾸 저쪽에서 차일피일 일을 미룬다는 것이다. 양심수 회장을 만났는데 이 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곧 만나야지요"하고 말했다. 이 분위기는 내가 무슨 이익을 위해서 그들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조금 더 세월을 기다렸다. 적십자 회장 쪽에서 연락을 해도 양심수 모임과 연결이 잘되지 않았다고 했다. 적십자 쪽은 나의 부탁이어서 일을 해보려는 것이지 다른 봉사활동으로도 바쁜 분들이다. 결국 그쪽에서 그렇게 회피적인데 더 이상 굽실거리며 봉사할 이유가 없다고 봉사원 쪽에서 손을 들고 말았다. 그 후 양심수 쪽 회장이 찾아왔는데 모임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질환진료에 관한 경비에 대한 질문만 했다.

왜 이 모임이 성사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모임도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되는 것을 몇 번 보았으므로 짐작이 되는 것이 있다. 모임을 해서 명예나 이익을 바라는 사람이 끼이면 일이 되지 못했다. 상대는 순수하게 봉사만 하고자 하는데 이쪽에서는 주도권이 상대방에 넘어가면 언론보도나 정부 기관에서 찬조를 받을 때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는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조직을 노출하기 싫어하는 어떤 숨은 이유도 있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미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봉사의 꿈이 깨졌고 적십자를 떠나오니 그 노인네들과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어졌다.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비록 초라한 노인네들이었지만 자세가 꼿꼿하고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던 그 사람들 말은 간결하고 감정은 단순했다. 나와 이념은 달라도 그 분들에 깊은 정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어느 해 추석, 그 노인들이 나에게 국산 토속주를 갖고 온 일이 있었다. 돈도 없으면서 명절이라고 술을 사온 것이었다. 해준 것도 없는데 나이든 어른들에게 선물을 받으니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인간이란 짧은 만남이라도 순수하면 이렇게 상대방에게 감정이 전달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적십자병원장을 하면서 마음 상하는 일도 많았지만 가끔은 이런 가슴 뭉클한 추억이 있어 혼자 뿌듯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간첩 출신 노인들을 보면서 비록 국가의 지시를 받고 그런 행동을 했지만 면면히 보이고 있는 성숙된 모습에 존경이 갔다. 이 분들을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에 사이비 빨갱이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일본의 극우파들이나 중국의 공산당 고위층, 그리고 심지어 이북관리들을 만나 보아도 대화가 다 잘 통했다. 물론 적십자사 근무를 하고 있으니 기본적인 공통된 이념과 믿음이 있어서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자나 민족근본주의자만 만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좋은 인간관계란 믿음의 바탕 위에 서로의 인간성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전향을 했든 아니면 강제로 전향을 했든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간첩 출신 노인들은 그들의 사상은 버리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호의나 진심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고 옳게 받아들였다. 무슨 꼬투리를 잡거나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 사람들과 생각은 달라도 인정이 오가고 존경심이 생긴 것 같았다.

이 장기수 출신들을 돌보고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은 그들만이 옳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의 결과인지 아니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을 의심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도움을 주려는 적십자부녀봉사회의 호의를 흐지부지하게 생각하는 행위는 정말 장기수 노인들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갖고는 있는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하였다.

8. 후기.

적십자병원 근무를 하면서 여느 병원에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많이 했다. 남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추억이다. 욕심은 많고 글재주는 없는데 원고는 장수의 제한이 있어 큰 사건만 추려서 의미를 전달하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고 말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원고를 쓴 이유는 역사가 책에 있는 것처럼 어떤 몇몇 영웅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수많은 일꾼개미들이 그것들의 집을 만들고 새끼를 키우고 먹이를 채집한다. 여왕개미는 알만 낳을 뿐이다. 인간의 역사도 소리 소문 없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대구적십자병원 이야기에 나오는 많은 내외국의 이름 없는 소시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란 말을 하며 이글을 끝낸다. <끝>

▷ 필자 약력

- 권영재(69)

-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 현 동승병원 진료원장

※삽화: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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