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수집은 '사라져 가는 그 무엇에 영혼을 입히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한자로 '收集'이라고 하지 않고 '蒐集'으로 쓴다. 즉 어느 특정한 대상과 감응, 소통함으로써 그 물건에 영혼을 불어넣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어릴 적 우체국 앞에서 한나절씩 줄을 서서 우표를 샀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사들인 것은 지우개만 한 종잇조각이 아니라 '특별하고 의미 있는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수집에도 대상이 있고 클래스가 있다. 누구는 액세서리, 골동품, 동전 같은 잡화류에 꽂히고 누군가는 보석, 자동차, 화폐 같은 럭셔리에 집착하기도 한다.
24년간 종(鐘)에 빠져 사는 사람이 있다. '종, 그것도 수집 대상이 되나?'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재태(58'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 씨는 수십 년간 세계 각국을 다니며 그동안 1만여 점을 모았다. 이제 이 종들은 각기 한 줄의 텍스트, 페이지가 되어 거대한 인문학 서적이 되었다. 이 이사장의 '탁상 종' 소리를 따라 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미국 국립보건원 연수 때 첫 수집
디지털 신호음에 익숙해진 신세대들에게 종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중년층에게 종은 다양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수업 시작을 알리던 학교 종, 새벽 골목을 울리던 두부 장수의 종소리부터 미사 시작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까지. 우리에게 종은 보통 기억의 조각이나 추억 속의 소품으로만 남아 있다. 저마다 향수로만 남아 있는 종을 수집 대상으로 여기기는 쉽지 않다.
이 이사장과 종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건 1991년. 미국 워싱턴 근교 국립보건원에서 연수를 받을 때였다.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밖으로 나왔는데 노인 봉사 클럽에서 바자회를 하고 있었어요. 신데렐라, 백설공주 종 등 50여 개를 호기심에 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한국제(Made in Korea) 마크가 찍힌 도자기 인물 종이었는데,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피겨(figure) 종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거죠."
한 번 시작된 종과의 '짜릿한 만남'은 이 이사장을 수집가의 세계로 안내했다. 초기에는 여행이나 학회 세미나 때마다 구매하거나 도시 벼룩시장을 찾아다녔다.
◆영화 '검은 사제들' 소품에도 등장
이 이사장의 수집품들은 가끔씩 특별한 외출을 하기도 한다. 11월에 개봉한 영화 '검은 사제들'엔 특별한 의식이 하나 등장한다. 악령이 들린 소녀를 구하는 구마(驅魔) 의식이다. 이 의식에 빠질 수 없는 도구가 하나 있는데 바로 '프란체스코 종'이다. 영화 제작진은 이 종을 수소문하다가 소문을 듣고 이 이사장의 연구실로 찾아왔다. 이 이사장은 장엄 의식에 가장 적합한 종을 추천했고 이 소품은 영화에서 구마 의식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종의 소재는 유리, 나무, 흙, 은, 상아, 합금, 자기 등 천차만별이다. 소재뿐만 아니라 형상, 양식에 따라서도 수백 가지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이 이사장이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데스크벨(Desk Bell)이라고 부르는 탁상 종이다. "데스크벨은 우리나라로 치면 문방사우와 정서적으로 닿아 있어요. 손때가 묻을 정도로 늘 곁에 두고 아끼는 대상이죠. 창작에 골몰하던 작가가 차(茶) 집사를 부르고, 오선지를 그리던 음악가가 잉크 심부름 하녀를 부르는 그런 용도입니다." 이 종은 지금도 이 이사장이 직원을 부를 때나 진료실에서 시간을 체크할 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유럽의 저택에서 집사나 하녀를 불렀을 데스크벨이 비슷한 용도를 쓰이고 있으니 그 효용이 시공을 넘어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24년간 세계 각국 돌며 1만여 점 모아
24년간 세계를 돌며 1만여 점의 종을 수집해온 이 이사장. '이제 초창기 종들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정말 그렇다면 진정한 컬렉터가 아니라고 정색을 한다. 하나하나의 종들엔 구매 과정의 에피소드부터 소포를 뜯을 때의 설렘까지 모두 기억되어 있다고 말한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종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미국 조각가 제리 밸런타인의 종이다. 밸런타인은 1972년부터 1996년까지 매년 1, 2개의 종을 한정판으로 만들었다. 톰 소여, 잔다르크, 에스메랄다(노트르담의 꼽추의 여주인공) 등 인물 종을 주로 제작했다. 이 이사장은 7년 동안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뒤져 '43개 풀세트 조합'을 완성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격추된 독일 전투기를 녹여 만든 V(빅토리) 종도 재미있다. 영국은 승전 기념으로 이 종을 제작해 당시 전사한 공군 가족들에게 기념으로 나눠주었다. 두랄루민 합금(비행기 몸체)으로 만들어졌고 금, 은도금으로 치장되었으며 당시 승전국 지도자였던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기원전 8~6세기경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청동 종도 그의 애장품 중의 하나다. 이란 북부 고원지대 루르스탄에서 발굴된 이 종은 당시 야생동물의 습격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종이었다. 고대 청동기시대 유물이니 골동품적 가치가 있을 것 같지만 대량 생산된 탓에 가격대는 10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종은 사람과 사람 이어 주는 소통 도구
한때 세계 각국을 다니며 골동품점과 벼룩시장을 누볐던 이 이사장. 그의 수집 방법도 진화를 거듭했다. 최근 대부분 구매는 이베이, 아마존 같은 해외 경매 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책장과 창고를 가득 채울 만큼 종을 사 날랐지만 항상 보람과 행복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시로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운송 중에 파손된 경우도 많다.
수도승이 화두를 찾아 순례에 나서듯 종의 매력에 끌려 각국을 순례했다. 그는 단순히 종을 구매만 한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세계 역사, 풍물, 인문학적 소양도 함께 모았다.
연구실 문을 나설 즈음 '1만 개 종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뭐가 남을까요' 하고 질문을 던졌다.
"소통이죠. 무녀(巫女)의 청동 방울이 사람과 하늘을 이어주고, 산사의 범종은 성(聖)과 속(俗)을 잇고 워낭 소리가 동물과 사람을 이었듯 말입니다. 목소리 외 다른 울림으로 사람과 대상을 이어주는 것 그게 종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이재태 이사장 걸어온 길
1957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고를 57회로 졸업했다. 경북대 의대에 진학해 핵의학교실 교수, 병원기획조정실장, 박물관장, 진료처장을 거쳤다. 미 필라델피아 심장연구소 연구원, 미국국립보건원 연구원을 지냈다. 2개의 국책연구단을 이끌며 SCI급 논문 150여 편을 포함, 모두 3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 핵의학 학회지 우수논문상을 수상했고 경북대 원암학술상도 받았다. 현재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전국 자치단체들 10년 전부터 '눈독' 이왕이면 대구 있었으면
사회에 기부·환원하고 싶은 종
자택에 6천여 점, 병원에 3천여 점, 충북 진천종박물관에 1천 점, 영천 시골집에 500점….
이 이사장이 모은 종은 어느덧 1만 점을 넘어섰다. 어느 것 하나 애정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제 소장과 보관이 한계에 이르렀고 최근 조심스럽게 이 종들의 용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기부나 사회 환원으로 결론이 모아지지만 그렇다고 수십 년 동안 모은 '분신'들을 물건 내놓듯이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이사장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치단체에서 종을 탐내는 곳이 많을 텐데.
▶종박물관이 있는 충북 진천군이 가장 적극적이다. 2006년 언론 기사를 보고 기부 요청을 해왔다. 개인적으로 수집에 꽤 많은 돈과 정성이 들어갔는데 무상으로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신 진천종박물관에서 5년째 테마전시회를 열고 있다.
-다른 자치단체에서도 요청이 있었다는데.
▶경주시, 충남 태안의 한 수목원 등에서 종박물관 설립, 기부에 대한 공식, 비공식 요청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았다. 요즘은 기부에 대한 규제와 방식이 까다로워졌다. 기부에 대한 법률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재산권 분쟁 같은 마찰이 일어날 수 있다.
-전시관에 대한 개인적인 구상은?
▶소중하게 모아온 수집품들이 대구에서 '용도'를 찾았으면 좋겠다. 대구에는 방짜유기박물관 같은 기념관, 전시관이 많이 있다. 요즘은 박물관도 집중화하는 추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방짜유기박물관이나 약령시전시관에 종박물관(전시관)을 단지화해서 같이 건립한다면 시너지효과가 생길 것으로 본다. 한상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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