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1968년, 한대수

1969년 서울 출생. 서울고등음악원. 대구MBC라디오
1969년 서울 출생. 서울고등음악원. 대구MBC라디오 '권오성의 귀를 기울이면' 진행

2015년 성탄절 아침, 유독 눈에 들어오는 책 한 권이 있다. 잉그리트 길혀홀타이의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이다. 세계적인 68혁명 권위자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68혁명이 사회, 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서구 보수주의자들은 68혁명에 대해 과도한 평등주의로 인해 자본주의 가치를 훼손시켰다고 비판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내 생각도 다르다. 사회학자이자 예일대 교수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말을 빌리면 현재의 민주주의를 만든 원동력은 '1848년 혁명'과 '68혁명'이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8일, 프랑스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있었던 일은 이른바 '수영장 사건'으로 불렸다. 어찌 보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프랑스 체육청소년부 장관인 프랑수아 미소프는 이 대학의 수영장 완공식에 참석했고 빨강머리의 학생 다니엘 콘벤디트는 장관의 청년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비판했다. 학생은 장관에게 청년의 성 문제가 빠진 보고서를 질책했고, 장관은 학생에게 수영장에 빠져 운동이나 하라고 충고한다.

다음 날 '르몽드'는 이 해프닝을 보도했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온다. 애초 시위는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수준이지만 구호는 점점 변한다. 학교 개혁과 사회 개혁으로 이어진 구호는 국경을 넘는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전시위가 조직되고 동유럽에서는 '프라하의 봄'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는 노동선전대가 대학으로 들어오면서 '문화혁명'이 비판받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전학련(全學連, 젠가쿠렌) 운동이 본격화된다. 68혁명으로 통칭되는 일련의 움직임은 청년이 주도한 최초의 혁명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일한 담론으로 세계에서 일어난 유일한 운동이었다. 비록 실패한 혁명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의 20대가 60대가 된 지금 68혁명을 경험한 나라는 평등과 민주주의,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변화를 경험했다. 시민의식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조용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남과 북은 모두 68혁명이 끼어들지 못했다. 엄혹한 냉전과 통제된 사회에서 '68'은 때 되면 찾아오는 숫자 정도고 혁명은 사전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였다. '천의 얼굴을 가진 혁명' 또는 '말의 축제'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구호와 담론이 등장했지만 한국 청년들에게 전해진 구호는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흐름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지 한국 청년 사회에 하나의 목소리가 나타난다.

추억 팔아먹기 정도로 회자된 '쎄시봉' 무대에 낯선 사람이 오른다. 말랑말랑한 팝송이나 불리던 무대에 그때까지 없었던 노래가 나온다. 정리되지 않은 외모처럼 목소리도, 노래도 거칠다. 거친 목소리로 장막을 걷고 행복의 나라에 가자고 노래한다. 이듬해인 1969년 9월, 남산드라마센터 무대에서 노래는 이어진다. 불 꺼진 무대에서는 톱으로 연주되는 음습함도 들린다. 마치 자유를 잃어버린 한국 청년들에게 바치는 진혼곡과도 같았다.

한대수는 한국 청년들에게 청년 정신을 알려줬다. 내 목소리로 내 생각을 노래하고 외칠 수 있는 정서를 가르쳐 줬다. 이른바 모던 포크의 시작이기도 하고 청년 창작 문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어제 성탄절, 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서 한대수의 공연이 있었다. 내년 봄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가지는 공연이라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거부했다. 여전히 장막을 걷으라는 외침에서 그가 이 땅에 처음 목소리를 낸 1968년을 떠올린다. 68혁명이 비켜간 그때의 대한민국과 68혁명을 모르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묘하게 겹쳐진다.

38년 만에 성탄절 러키문이 떴다. 2016년에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한 가지만은 이뤄달라고 소망해 본다. "상상력에게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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