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동기들과 과연 이 드라마가 제대로 될 것인가를 가지고 의견을 나눴다. 1988년이라면 인질을 잡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던 탈옥수가 사회적으로 큰 공감을 얻었을 만큼 공정하지도 않았고,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었던 대통령이 퇴임했지만 그렇게 정의롭지도 않았던 세상이었다. 그런 어두운 면을 제외하고 1988년의 추억을 살려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이 될 텐데, 그 시절 고등학생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라고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문을 밑줄 치고 외우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학교를 떠나며 외치던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가 그 시절 학교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으니 아련한 추억과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대학생이 주인공이 되어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학과 선배들의 성향에 따라 NL이나 PD 어느 계열에 속해 '민중, 민주화, 통일'에 대한 주제로 밤새 토론하고, 낮에는 집회에 나가던 것이 일상이었다.
1988년의 주인공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일들도 만만찮다. 1989년이 되면 온갖 고난을 뚫고 전교조가 설립되었으며, 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탄생이 임박하게 된다. 또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 씨가 운동권의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었다. 한마디로 요즘 세상에 드라마로 보여주기에는 위험한 내용들이 그 시절 기억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실제 드라마를 보니 그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 중에서 '추억'이 될 수 있는 것들만을 잘 골라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가 꿈꾸던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로 대체함으로써 아주 흥미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기억'과 '추억'을 가장 잘 이용하는 기획이다. 기억은 보고 듣거나 학습한 것들이 머릿속에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기억 중에는 나쁜 기억도 있고, 좋은 기억도 있으며, 좋고 나쁠 것도 없는 잡다한 생각들이나 인상 깊었던 장면 모두가 해당된다. 기억력이라는 것은 많이 저장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필요한 때에 꺼낼 수 있는 능력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억은 상황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추억(追憶)은 한자의 뜻대로 의식적으로 기억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추억의 대상은 당연히 멀리 떨어진 기억이고, 쫓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기억이다. 추억을 하는 것이 그리움의 감정과 연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군대 시절의 추억'과 같은 말은 모순 형용에 가까운데, 그래도 이 말이 성립될 수 있는 이유는 군대 생활 중 10%의 소소한 재미는 있었고, 나머지 90%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추억'과 같은 말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가질 수 없는 순수함이나 열정 같은 아름다운 구석이 있기 때문에 추억하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은 떨어지는데, 추억력은 점점 더 커져간다. 당장 이틀 전의 일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 20년 전 첫눈 오는 날 대구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문득 생각나면서 그 시절의 모습이 한편의 스크린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그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리 아름답지 않을 것이지만, 다시 오지 않기에 아름답게 보인다. 올 한 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있겠지만,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기억과 다르게 추억될 수 있을 것이다.
잘 가라,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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