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세밑의 청와<靑蛙'청개구리>

어김없이 찾아온 연말입니다. 소란한 거리나 다소 들뜬 마음과는 달리 세밑은 우울함이나 서글픔 같은 것이 따라다닙니다. 못다 한 일이나 하지 못 한 일, 이러저러한 후회 같은 것이 또 한 해가 간다는 아쉬움과 함께 섞여 씁쓸한 기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 고되고 힘들었어도 지나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심정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노랫말처럼 "태양은 어제와 같지만, 당신은 늙어가고/숨이 가빠지며 어느 날 죽음에 이른다"는 유한자(有限者)의 본질적인 숙명 같은 것이 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소설가 이병주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상범으로 10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인 주인공의 형이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 3년이 지났으니까 남은 건 7년이다.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없는 세월이니 단조롭기 짝이 없지만, 지난 3년을 돌이켜 볼 때 참으로 빠르게 흘렀다. 견디는 현재는 지루한데 지나 버린 시간이 빨라 뵈는 것은 내용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1년 전 그날이나, 한 달 전 그날이나, 그제의 날이나, 어제의 날이나 꼭 같이 무내용 하니까, 흘러가버리고 나면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모양이다."

이 글처럼 해마다 이것저것 새로운 일이 가득한 것 같아도 그 앞의 다른 해와 비교해 특별한 것이 없다 보니 1년이 앞의 세월과 한 덩어리가 돼 한꺼번에 훌쩍 흘러가버린 듯합니다. 이는 본지가 뽑은 10대 뉴스에서 나타납니다. 메르스 사태, 역사교과서 국정화, 성완종 리스트 파문, 제1야당 분열, 갈등 키운 식물국회 등등입니다. 여기에다 2014년부터 이어져 해결 기미가 없는 세월호 사태와 노동개혁, 서민경제 파탄, 청년 실업난 등 제목만 달랐지 좌우'빈부'세대 간 갈등 등 고질적인 문제는 수십 년째 되풀이입니다.

국민은 죽을 맛이라는데도 대통령은 겁박을 보태 소리만 지르고, 여당과 고위관료는 납작 엎드리고, 야당은 제풀에 쓰러져 비틀거립니다. 국민을 부모처럼 섬겨야 할 대통령이나 공직자, 정치인을 보면 부모 말씀에 엇박자만 내는 청개구리 같습니다. 이러니 대통령의 아버지가 누구라 한들, 이발소에 갈 때마다 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라는 글을 골수에 새겨야 할 명언이라고 믿고 산 세대라 한들 어찌 서글프고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며 단련한 좋은 맷집에다 갈고닦은 학습효과가 없었다면 모두 화병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용케 화병 안 나고, 잘 견딘 것을 축하하며 뭔가 그럴듯한 연말연시 인사를 드리고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한 해 마무리 잘하시고, 건강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길 바란다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어감은 이상하지만 오는 '병신년'(丙申年)은 지 재주만 믿고 까부는 원숭이가 아닌 신기막측한 재주로 국민을 즐겁게 하는 원숭이해였으면 하는 바람도 생각해 봅니다.

조금 긴 사족입니다. 내년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늘 그랬듯 선거판은 청개구리의 놀이터입니다. 지 잘나갈 때는 국민의 뜻은 안중에도 없이 멋대로 왝왝거리며 놀다가 선거철만 되면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며 아양 떠는 청개구리 판입니다. 대구'경북은 더욱 심합니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고만고만한 개구리들이 저마다 청와대를 주름잡던 진정한 청개구리라고 외칩니다. 그곳이 푸른 지붕의 청와대(靑瓦臺)가 아니라 청개구리가 떼 지어 사는 청와대(靑蛙臺)였던 모양입니다.

경험으로 미루어 번드레한 미사여구를 섞어 진짜를 강조하는 청개구리일수록 짝퉁이 더 많습니다. 이런 청개구리만 안 뽑으면 내년 연말에는 빠른 세월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도 '한 가지 일은 확실히 해낸 보람'이 함께할 것입니다. 도장 한 번 잘 못 찍어 4년 내내 무덤 떠내려갈까 걱정해서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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