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 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48)대구시민의 노래

삽화: 조성호
삽화: 조성호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 유리창을 닦았다. 남자아이들 유리창 청소는 흐지부지 건성이었지만 여자들은 열심히 닦았다. 이때 부르는 노동요가 '대구시민의 노래'였다. '능금노래', '피난민 소녀' 그리고 '공군 아저씨' 등 몇 가지 레퍼토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대구시민의 노래가 항상 톱으로 불렸다. 옆 반에 지기 싫어서 악을 썼던 것 같다. 더 빛나는 창문, 더 큰 노랫소리, 더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계집애들은 죽을 힘을 다했다.

"팔공산 굽이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강 굽이돌아 보담아 주는 질펀한 백 리 벌은 이름난 복지,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들어라 드높게 희망의 불꽃."

나는 6'25전쟁이 끝나던 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공평동 교사는 UN군에 징발을 당해 못 들어가고 신천 부근 빈터에 판잣집을 지어 수업하고 있었다. 고학년들은 그 판자 교실도 없어서 신천 둑에서 노천 수업을 했다. 저학년인 우리는 교실은 있었다고 하나 그렇게 편하게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 교실을 썼는데 그 반도 남녀 두 반이 합반해 수업했다. 다시 말하면 네 반이 각각 둘로 합쳐 오전 오후 수업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책상도 없어 '도마 책상'이라고 하여 긴 도마처럼 생긴 두 개의 앉은뱅이 책상을 마주 붙여 여러 명이 옆으로 앉아 수업을 받았다.

아침이면 오후반 아이들도 오전반 아이들과 같이 학교에 왔다. 딱히 갈 데가 없으니 오후반도 아침부터 학교에 와서는 오후 수업까지 학교 부근에서 뛰어놀았다.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임시교사는 당시에는 '도립병원'이라고 불리던 경북대병원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병원 담 남쪽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가에는 수북하게 자란 야생초가 우거져 있어 우리 학교와 경북대병원 부근은 그때까지만 해도 시골 풍경 그대로였다. 교실에서 수업한다고 하지만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고함에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소리도 시끄럽거니와 아이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울음소리도 들렸다. 계집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고무줄놀이를 하다 남자아이들에게 고무줄이 잘려 분해서 울었다. 남자들은 치고받고 장난치다 울기도 했지만, 물에 빠져 우는 놈도 있었다.

도랑물은 너비가 각각 다른데 용감한 아이들은 폭이 넓은 쪽으로 가서 뛰어넘고 심약한 축들은 폭이 좁은 물을 뛰어넘었다. 용기가 없는 아이들은 아예 뛸 생각은 하지 않고 관전만 했다. 자신이 멋진 사나이임을 보여주고자 남자아이들은 허구한 날 그 도랑을 뛰어넘었다. 그러다가 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물에 빠진 놈은 좀 전까지 그 용감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 때가 되면 장날이 된다. 오전'오후반이 한꺼번에 학교에 모여드니 교실은 물론 운동장도 그 숫자를 다 감당하지 못한다. 학교 골목까지 아이들이 빼곡히 모여 종업식을 했다. 매미는 우렁차게 울고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합창을 이루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은 자신의 말을 아이들이 잘 듣는 줄 착각하고 뭐라고 긴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우리는 그 혼란과 무질서의 아수라 지옥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인생은 원래가 그런 줄 알았다. 무지(無知)란 인간을 태평스럽게 한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그때 참 고생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학교는 유리창마다 돌로 긁어서 '中央'(중앙)이라고 새겼다. 누가 유리창을 훔쳐갈 것도 아닌데 그 많은 유리창마다 학교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 유리창을 닦았다. 남자아이들 유리창 청소는 흐지부지 건성이었지만 여자들은 열심히 닦았다. 이때 부르는 노동요가 '대구시민의 노래'였다. '능금노래', '피난민 소녀' 그리고 '공군 아저씨' 등 몇 가지 레퍼토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대구시민의 노래가 항상 톱으로 불렸다. 옆 반에 지기 싫어서 악을 썼던 것 같다. 더 빛나는 창문, 더 큰 노랫소리, 더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계집애들은 죽을 힘을 다했다.

전쟁이 끝났다. 우리 학교에 있던 외국 군인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고 우리도 본교로 돌아왔다. 우리 임시교사는 동덕국민학교가 되었다. 그 학교 학생들은 몇 년 동안이나 중앙이라고 새겨진 유리 창문 속에서 공부했다. 하긴 동덕학교는 중앙, 삼덕학교에서 차출된 학생으로 신설된 학교이므로 중앙 출신들은 그렇게 낯설 것도 없는 풍경이었으리라. 4학년 때 학교에 되돌아오니 어리둥절했다. 운동장은 전부 시멘트로 발라져 있었고 강당 벽에는 총천연색의 화려한 여자 나체그림과 영어 낙서로 도배돼 있었다. 교실 창마다 가로질러 있던 철봉도 일제강점기 때 공출로 없어지고 커다란 새장은 그대로 있었지만 새는 한 마리도 없었다. 있어야 할 것은 없어지고 없어야 할 것은 넘치고 있었다. 매일 시간만 나면 군인 아저씨들과 5, 6학년 학생들이 시멘트 깨기를 했다. 강당에 가서 그림 지우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운동장은 흙을 되찾았고 강당의 여자들과 영어도 다 지워졌다.

본교에 와서도 여자아이들의 노래는 계속됐다. 곡목은 여전히 대구시민의 노래였다. 어린 여학생들이 왜 동요를 부르지 않고 그런 노래를 불렀을까? 담임선생님이 노래 곡목까지 지정해주지는 않았을 텐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본교에 돌아오니 교실과 복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깔렸던 나무 바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탓에 아이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 나무 바닥을 치자로 붉은 물을 들이고서 매끄럽게 빛나라고 양초 칠을 한 뒤 걸레질했다. 이때도 여학생들은 대구시민의 노래를 불렸다.

어릴 때 추억은 죽을 때까지 간다. 대구시민의 노래에 각인된 나는 팔공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웅장해진다. 낙동강 가에 서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정조 때 규장각 학자 윤행임은 말했다. "함경도 사람은 이전투구(泥田鬪狗), 평안도는 맹호출림(猛虎出林), 황해도는 석전경우(石田耕牛),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 강원도는 암하노불(巖下老佛),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 그리고 경상도는 태산교악(泰山喬嶽)"의 기질을 가졌다고 했다. 중앙국민학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을 '웅장하고 늠름한 기개'를 가졌다는 뜻의 태산교악이 되도록 늘 노래로 각인시켜주었다. 광복둥이 그녀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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