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응답하라 1988)의 고교생 바둑기사 최택은 금은방집 아들이다. 시계포를 겸한 '봉황당'은 홀로 아들을 키우는 최무성의 일터이자 소시민을 상징하는 장치다. 허름한 동네 골목 이미지와 걸맞지 않게 '금은보석' '고급시계'라고 큼직하게 써 붙인 봉황당의 아크릴 간판은 정겹지만 실웃음을 자아낸다.
카메라가 스치듯 지나가기 일쑤인 봉황당에서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는 것은 갖가지 괘종시계다. 지금이라고 크게 느낌이 달라질 게 없지만 지난날을 어슴푸레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금은방에 드나들 일이 없는데도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주며 자란 요즘 40, 50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시계가 더 이상 시간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도 벽시계에 대한 정서는 독특하다. 마치 박제처럼 세월과 함께 굳어진 추억의 대응물이다.
벽시계에서 느끼는 이런 감정을 뒤엎는 물건을 꼽자면 명품 시계다. 명품 시계는 고작해야 정밀 부품의 집합체이나 부와 스타일을 과시하는 도구다. 우리 정'관계에서 명품 시계 뇌물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대물(對物)인식 변화의 한 단면이다.
전 세계 어디든 뇌물이나 재산 은닉 수단으로 명품 시계를 동원한다. 국내도 그동안 선물 명목으로 줬다 뒤탈이 난 명품 시계가 숱하다. 가까이는 어느 재벌 총수가 고위 국세청 인사에게 명품 시계를 돌렸다가 화를 불렀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재판 중인 박기춘 의원의 뇌물 리스트에도 수천만원짜리 시계가 여럿 나왔다. 하지만 '대가성 없는 선물'이라며 부인하자 처리가 곤란해진 검찰이 뇌물죄 대신 정치자금 수수죄를 시계에 적용하기도 했다.
검찰이 5일 공무원에게 억대의 뇌물을 건네고 해외 거래처에게서 명품 시계 등을 받은 혐의로 민영진 KT&G 전 사장을 구속 기소했다. 증거로 명품 시계 6점이 등장하는데 4천500만원 상당의 스위스 명품 '파텍 필립'도 포함돼 있다.
명품 시계는 값이 천차만별인데다 상대 취향과 연령 등 소위 '깔맞춤'하는데 그만한 게 없다. 상속'증여가 손쉽고 환금성도 뛰어나다. 한정품이라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줄지 않는다. 명품이라서, 흔치 않아서, 가치가 대단해서 뇌물과 부당 거래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민이 괘종시계에서 느끼는 정서마냥 명품 시계는 죄가 없다. 문제는 그에 투영된 인간 탐욕과 비틀린 정서다. 하지만 비쌀수록 형량이 무거워진다는 점에서 명품 시계는 유죄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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