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한의사의 현대 의료 기기 사용을 허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의료단체가 일제히 반대 성명을 냈다. 또 정부가 한의사의 현대 의료 기기 사용을 허용하면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정부는 '사실무근'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여파는 멈추지 않고 있다. 오히려 소문을 흘려 의료계의 반응을 본 뒤 강행 여부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만 증폭되는 상황이다.
한의학계는 의료계의 반대를 '직능 이기주의'라고 주장하며 관철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면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한의학계가 주장하는 '한의학의 세계화·과학화'를 위해 정부가 투자한 예산이 3천968억원이다. 2011~2015년 총 1조원이 책정됐지만 세계적 기준에 맞는 기기 개발은 고사하고 기존 한의학의 제대로 된 표준화 작업도 제시하지 못했다. 세계화라는 것은 과학적 체계를 갖추고 이를 다른 국가의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 나라가 없다는 것은 아직 근거나 결과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사를 굳이 '양의'라고 바꿔 부르는 저의가 이해는 되지만, 검증된 의학 이론과 신의료 기술들을 적용시키는 의사들을 마치 우리 것은 버리고 외국의 기술만 선호하는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 한의학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식으로 포장하려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한의학계가 그들의 기본 체계인 경락이나 기의 흐름을 근거 있는 과학으로 규명해 내기를 바란다. 또 그러한 규명이 의학의 획기적인 발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은 뒤로한 채 오히려 체계가 전혀 다른 현대 의학, 그중에서도 수익 면에서 유리한 비급여 항목인 초음파나 레이저 사용을 허가받아 수익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한의사들이 현대 의료 기기를 사용하게 되면 검사 결과들을 한의학의 입맛에 맞게 포장하고, 왜곡하며, 뜯어고쳐 환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설명하는 데 악용되지 않을지 너무나 걱정스럽다.
'갑'이라는 집단이 '을'이라는 집단에 허용된 특정 권리를 같이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어난다. 갑은 관련 지식을 충분히 배웠다고 주장하지만, 을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반대한다. 결국 을은 갑에게서 권리를 방어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지난 1993년 약사의 한약 조제 허용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적절하게 배웠다고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더 좋은 접근성을 제공하겠다는 약사들의 한약 조제를 한의사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약사들은 약용식물학을 배웠으므로 충분히 한약 조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한의사는 약용식물학만으로는 본초학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한의사들의 주장대로 단편적인 교육만으로 완벽한 의료를 제공하긴 힘들다. 약용식물학만 배워 한약을 조제하겠다는 약사들의 주장에 비해, 의과대학과 수련 과정을 포함해 10년 이상 영상 의료 기기와 살다시피 해야 판독 가능한 영상의학을 단지 몇 학점짜리 수업만으로도 충분히 시행할 수 있다는 한의학계의 주장이 더 황당해 보인다. 미국에서 일부 분야에서 시행 중인 대체의학을 한의학과 같은 것이라고 강변한다면, 미국 대체의학 중 하나인 침구사와 허브(약초)치료사 면허를 가진 사람들도 우리나라 한의사와 동급이고, 한의사 시험을 치를 자격을 줘야 하는가.
새해에는 학식과 소신을 갖고 의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대우가 돌아오고, 전문가의 의견이 존중되는 올바른 의료 환경 아래에서 진료하고 싶다는 소망이 현실로 이뤄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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