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 <9>가야산 넘어 합천군으로

성철 스님 입적하기 전 머물렀던 '백련암'

기암괴석의 향연이며 가야산 절경의 백미로 손꼽히는 성주 가야산 만물상.
기암괴석의 향연이며 가야산 절경의 백미로 손꼽히는 성주 가야산 만물상.
가야산에서 절승지로 꼽히며, 성철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했던 백련암. 원통전 앞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작은 사진은 성철 스님.
가야산에서 절승지로 꼽히며, 성철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했던 백련암. 원통전 앞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작은 사진은 성철 스님.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희랑조사의 사연을 담고 있는 희랑대와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목조 희랑조사상. 특이하게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일신문 DB.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희랑조사의 사연을 담고 있는 희랑대와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목조 희랑조사상. 특이하게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일신문 DB.

성찰의 길 마지막 코스다. 심원사와 가야산 만물상을 뒤로하며 가야산을 넘었다.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의 보살핌으로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은 무사히 합천군으로 접어들었다.

해인사가 가까워지면서 해인사 말사들을 만난다. 해인사 말사는 전국에 172개 사찰이 있다. 팔만대장경 이운 길에도 백련암, 희랑대, 지족암, 국일암 등 5, 6개 사찰을 거쳤다. 여기서는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머물렀던 백련암과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희랑조사와 얽힌 사연을 담고 있는 희랑대를 가본다.

◆자연의 교향악 가야산 만물상

가야산 절경의 백미로 손꼽히는 만물상. 만물상 남서쪽인 상아덤과 동북쪽인 백운대에서 보는 모습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아! 이거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마디로 '기암괴석의 향연'이고 '자연의 교향악'이다.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바위와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선사한다.

만 가지 형상을 한 가야산 만물상 능선은 국립공원 지정 이후 38년 만인 2010년에 등산로를 개방했다.

코끼리바위, 돌고래바위, 기도바위(부처바위), 두꺼비바위, 쌍둥이바위 등 갖가지 모양을 한 바위가 뽐내는 듯 지천에 널려 있다. 코끼리바위는 몸통을 감추고 수줍은 듯 길쭉한 코만 드러내고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가만히 턱을 괸 형상의 얌전한 돌고래바위가 있는 반면, 마치 먹이를 달라고 점프를 하는 듯한 모습도 있다. 기도바위는 아직도 기도가 끝나지 않은 듯 세상을 등지고 면벽 좌선하는 모양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그 자세다. 두꺼비바위는 원체 덩치가 큰 녀석이라 옆을 지나쳐도 그 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없다. 한참을 지나 뒤돌아봐야 제대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광개토대왕비석처럼 생긴 바위, 쌍둥이바위 등 그 형상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비바람에 깎이고 씻긴 기암괴석들은 억겁의 세월을 대변하고 있다.

만물상 능선의 백미는 그 능선 꼭짓점에 있는 상아덤까지 계속된다. 상아덤에 올라서면 만물상의 모든 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참을 이리저리 뜯어본다.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돌아가며 보아도 탄성만 나온다.

◆성철 스님 자취 서린 백련암

백련암(白蓮庵)은 해인사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한적할 뿐만 아니라, 경계 또한 탁 트여 시원하다.

'해인사지'는 가야산에서 홍제암, 원당암, 백련암을 가장 유서 깊고, 경치가 아름다운 3곳의 암자로 꼽고 있다.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예부터 백련암을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로 일컬어 왔다.

백련암을 처음 창건한 연대는 잘 알 수 없고, 다만 선조 38년(1605년)에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 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암이 해인사를 수호하였는데, 왜병들이 소암의 명성을 듣고 해인사 앞의 산마루턱에서 넘겨보았을 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고승들이 즐겨 수행처로 삼아 오던 이곳은 역대로 산중 어른들이 주석해 왔다.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일찍이 주석하였고, 성철 스님께서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한 곳으로 유명하다.

백련암 원통전 앞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부처님의 얼굴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불면석(佛面石)이라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실로 당겨도 바위가 당겨온단다.

새벽에 내린 이슬로 촉촉이 젖은 백련암에 서니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무소유의 청빈한 삶으로 아직도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님의 자취를 백련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속세와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했던 스님은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서 행한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밤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하는 것)와 10년간의 묵언(默言) 등으로 세인들에게 각인돼 있다.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된 이후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백련암에서 구도를 계속했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며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었던 스님은 1993년 열반에 들면서 열반송을 남겼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스님이 환생이라도 했는지 사찰을 찾은 기자를 고양이 한 마리가 반갑게 반겨준다. 취재하는 동안 사찰 곳곳을 안내해 주던 고양이는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지 절을 떠나는 기자를 문밖까지 배웅해 준다.

백련암의 모기떼 이야기는 아직도 구전돼 온다.

백련암을 창건한 백련 스님(가상 인물)은 참선에 몰두했다. 가야산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변화도 잊은 채 참선에만 온 정신을 쏟았던 터라 어느 여름날 몰려오는 피곤함을 물리칠 수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계곡을 따라 백련암에 불어올 때 피곤했던 스님은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아침 햇살이 백련암을 밝게 비추고,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솔바람 소리가 산봉우리를 휘감았다. 밤새 내린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뭇잎을 보니 마치 신선들만 사는 곳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스님은 속세에서 있었던 생각들이 사무쳤다. 지그시 감았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부모님과 함께 자란 형제, 정답던 친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참선을 그만둘까 하는 유혹에 빠지려는 순간. 백련 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라도 부처님의 품을 벗어나 속세를 생각한 것이 크게 후회가 됐다.

"이래서는 안 되지. 잠을 쫓을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하고 골똘히 생각하던 백련 스님은 무릎을 탁 쳤다. "옳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가야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백련암은 삼복더위에도 밤이면 이불을 덮어야만 하는 곳이라 모기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백련 스님이 생각해 낸 것은 해인사와 모든 암자에 있던 모기를 모두 백련암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백련 스님은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던 모기떼들이 순식간에 백련암에 날아들었다. 암자 구석구석까지 꽉 들어찬 모기떼들은 스님이 잠이 들려는 기미가 보이면 성가시게 달려들었다. 백련 스님은 모기들 덕분에 맑은 정신으로 참선을 성공리에 끝냈다.

◆화엄학 대가 희랑조사 수행 도량 희랑대

백련암에서 내려오다 만나는 희랑대(希朗臺). 희랑대는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희랑조사와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 아마 팔만대장경 경판이 한양 지천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겨온 것도 희랑조사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희랑대는 백련암과 해인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크고 작은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암자다. 족히 보아도 벼랑이 20m가 넘을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 낸 아찔하고도 신비로운 풍경이다.

희랑대는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조사가 머물던 곳으로서, 자연이 이루어 낸 기기묘묘한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말미암아 일찍이 금강산의 보덕굴에 비유되곤 했다.

희랑대는 기도처로 꽤 유명하다. 이곳에서 기도해 부자가 되었다거나 하는 여러 영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암자는 특히 일반 신도들에게 친근하다.

희랑조사(889∼956)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해인사의 고승이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였던 스님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해인사를 중창하기도 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조사도(祖師圖'1892년 제작)를 보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 이정 스님과 함께 그려질 만큼 희랑조사는 불법을 크게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해인사 들머리에 있는 성보박물관. 다양한 불교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대장경 인경 체험도 가능하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에서는 나무로 만든 희랑조사상을 만날 수 있다. 1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각상은 희랑조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보물 제999호로 지정돼 있다. 사람 앉은키 높이인 82.7㎝의 이 조사상은 나무로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초상 조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희랑조사상을 보면 가슴 한가운데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다. 희랑조사상은 온화한 눈빛, 광대뼈가 튀어나온 볼, 오똑한 코, 부드럽게 다문 입, 서로 포개진 앙상한 손 등 노승의 풍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희랑조사가 직접 조각상을 만들면서 자신이 전생에 흉혈국(胸穴國) 사람임을 표시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는 전설이 있다. 팔만대장경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해인사에서 가장 아끼는 조각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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