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동·서편제 아우른 경주 소리꾼 정순임 명창

소리는 본래 하나의 그릇, 둥글디 둥근 우주일 뿐…동서樂 구분·우열 있나요

"소리는 본데 하나로 구분이 없습니다.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것은 인위적 가름일 뿐 거기에 무슨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순임 명창이 '세천향민속예술단' 공연을 앞두고 판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 세천향민속예술단 제공

우리나라 판소리 창법의 한 유파인 서편제. 유연애절(柔軟哀切)한 성음과 계면조(界面調) 가락을 특징으로 한다. 섬진강 너머 구례, 곡성, 멀리 경상도에서 터를 잡은 동편제는 웅건(雄健)하고 청담하며 호령조가 많은 우조(羽調)가 매력으로 꼽힌다. 두 유파는 한국의 국악을 동서로 가르며 양대 산맥으로 자리해 왔다.

1960년 무렵 서편제의 정통 수련자였던 장월중선(張月中仙'1925~1998)이 대구를 거쳐 경주에 정착하게 된다. 호남 명창의 갑작스러운 영남 입성, 음악적으로 의미 있는 도피나 변절처럼 비치지만 사실은 지독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장월중선은 국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경주에 수많은 명곡과 제자들을 남기고 1998년 한 많은 세상을 마감했다.

다행히 장 명창이 남긴 소리의 맥은 장녀 정순임(73)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호남처럼 소리가 활성화되지 못했던 대구, 경주에서 두 모녀는 음악적 동지이자 사제 관계로 지내며 국악 전수를 위해 평생 헌신했다.

정순임 명창 역시 20대 중반까지는 호남에서 서편제의 정통 맥을 이었고 다시 50여 년 동안은 동편제의 한복판 경주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다. 서편제, 동편제의 모든 유파를 아우르며 국악 대중화에 힘쓰고 있는 정 명창을 인왕동 판소리연구소에서 만나보았다.

◆예술인 최고 영예 옥관문화훈장=인터뷰 자료를 준비하면서 검색 중에 제일 먼저 눈에 띈 자료가 있었다. 작년 12월 수상한 옥관문화훈장 수훈 소식이었다. 옥관문화훈장은 국민 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공적이 뚜렷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대통령 표창이다. 국악계에서는 안숙선, 박송희 명창이 이 수훈 반열에 올라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상이다.

정 명창은 "이 상은 내게 내린 상이 아니라 소리 불모지였던 대구경북에서 국악을 진흥시킨 어머니 장월중선에게 내린 상"이라며 인터뷰 말문을 열었다.

옹알이를 겨우 끝낸 여섯 살 계집애가 어머니 어깨너머로 창을 배운 지 70년 만이고 경주에 정착한 20대 처녀가 후진 양성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닌 50년의 노고가 이룬 결실이었다.

기악, 무용부터 창까지 다재(多才)한 끼를 물려받은 정 명창. 그중 대표적 장기는 판소리 '흥보가'를 친다. 2007년 경북도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은 이 '흥보가'는 송흥록-송광록-송만갑-박록주-박송희로 이어지는 정통 창맥의 계보를 이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에 50년째 머무르고 있는 정 명창의 국악 특징은 우선 계면조(슬프고 애절한 가락)에 정통하다는 것이다. 25세에 경주시립국악단 강사로 오기 전까지 광주, 보성 등지에서 명창들을 사사하며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등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서편제 선율이 동편제의 본고장 대구경북에서 동서를 아우르는 선율로 녹아든 것은 동과 서, 네편 내편을 가리지 않는 정 명창의 넓은 아량 덕일 것이다.

◆'장월중선은 가'무'악에 능했던 국악인'=장월중선 명창 집안은 200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판소리 명가 1호'로 지정됐다. 이때에 비로소 명창 집안으로 가문을 일으킨 것 같지만 그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조선 후기 판소리, 거문고 명인이었던 장석중(張石中)에까지 닿는다.

가문을 국창(國唱)의 반열까지 끌어올린 분은 장판개(張判盖), 큰외조부였다. 어전 명창이었던 장판개는 고종으로부터 혜릉참봉 교지를 받을 정도로 황실의 총애를 받았다. 송만갑의 주선으로 어전에 초대되어 '적벽가'를 부른 후 3정승 6판서를 매료시켰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이런 창맥을 이은 어머니 장월중선이 국악에 남긴 자취는 보통 예인의 경지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할머니(장도순)의 '8잡기꾼'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어요. 이 말은 국악의 전 분야를 통틀어 그 재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고모 장수향에게 배운 가야금 산조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였습니다. 목포의 이름난 춤꾼들을 찾아다니며 진쇠춤, 승전무, 심불로(心不老), 태평무를 익혔고, 당대 악기 명인들을 사사하며 거문고, 아쟁, 가야금, 해금에 피리까지 모든 악기에도 통달했습니다. 어머니의 예술 세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장월중선처럼 가무악(歌舞樂)에 능한 사람은 전무했고 앞으로도 조선에 이런 예인은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영호남 아우르며 동편제'서편제 조화=영화 '서편제'에서 대감 집에 소리 품을 팔러 다니던 송화처럼 그 시절 소리꾼에게 궁핍은 일상이었다. 호남 지방에서 국악의 팔방미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장월중선이 대구, 경주로 오게 된 것도 단순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호남의 유명한 주먹이었던 아버지(정우선)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40대 청춘에 혼자 되셨어요. 막 커가는 3남매를 키울 방도가 없어 고민할 때 대구 미군부대에서 악단을 하시던 외삼촌이 엄마를 대구로 불러올리셨어요. 그 무렵 경주에 관광 붐이 불고 서비스 여성, 관광요원들을 지도할 국악강사가 필요하게 되자 어머니가 급히 그 자리로 가게 된 것입니다."

광주, 해남에서 이름을 높여가던 정 명창이 경주시립국악단 강사로 오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후 동생 정경호(아쟁산조, 오빠), 정경옥(가야금병창, 동생)이 모두 경주에 정착하면서 국악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 명가의 후손들은 2007년 '세천향민속예술단'을 결성하고 매년 경주에서 창극이나 기획 공연을 벌이고 있다.

서편제의 고향에서 정통 국악을 배웠던 정 명창은 20대에 동편제의 한복판인 경주에 뛰어들면서 영남의 소리에도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애써 동편제의 가락을 배우지 않았지만 영남의 흥과 가락은 어느덧 그녀의 노래, 삶 속에 녹아들었던 것이다. 서편제와 동편제의 차이점에 대해 묻자 '소리에 무슨 경계와 구분이 있느냐'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소리는 본래 하나의 그릇입니다. 둥굴디 둥근 우주의 세계죠. 이쪽 지방과 저쪽 고을이 따로 없고 네 편 내 편이 없는 것입니다. 각자 있는 자리서 소리를 하면 두 성조와 억양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저는 영호남을 넘나들며 국악을 해왔지만 동서악(樂)을 구분하거나 우열을 매긴 적이 없어요."

◆정순임 명창은…1942년 전남 목포시 죽동에서 태어났다. 6세에 국악에 입문해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를 배웠다. 15세에 임춘앵여성국극단에 합류해 도창을 맡았고 25세에 경주시립국악단 강사로 재직했다. 1999년 경희대대학원 최고정책과정을 이수했고 동국대, 중앙대, 부산대, 경북대 등에서 국악 판소리 실기강사를 역임했다. 대통령상(1985), KBS국악대상(1997), 옥관문화훈장(2015) 등을 수상,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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