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임건순 지음/ 시대의창 펴냄
"맞습니다. 하늘은 거저 우리들 눈에 보이는 자연일 뿐입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환경일 뿐이지요. 인간과 집단 앞에 놓인 삶의 조건이자 문제 상황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행동과 실천이지요. 외적 환경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늘과 인간을 철저히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그냥 단순히 생물학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인간이 기울이는 노력과 실천까지 포괄하는 의미의 존재입니다. 자, 잘 들으세요. 천으로 대변되는 인간을 둘러싼 '외적 대상'을 '인간(과 인간의 노력, 실천)'과 분명히 구분하자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천인지분입니다."(77, 78쪽)
"제가 분명히 그런 말을 했지요. 맹자는 성위지분을 몰랐다고. 인간이 노력해서 일궈낸 긍정적인 것들, 아니면 인간이 의식적으로 실천해야 할 행위를 맹자는 주어진 인간 본성이라고 했지요. 그 말이 맞다 합시다. 그러면 인간이 실천과 노력을 소홀히 할 겁니다. 해야 할 것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맹자 성선설의 문제라고 편에서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이 배움을 소홀히 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행위와 실천은 우선 배움이 전제된 후의 이야기입니다."(448쪽)
이 책은 젊은 동양철학자인 저자가 순자와 그의 사상을 21세기 한국에 소개한다. 형식이 좀 독특하다. 보령이라는 가상의 한국 대학생을 설정하고, 순자를 현실로 불러내 인터뷰하는 방식이다. 이런 까닭에 내용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술술 읽히는 재미와 매력이 있다. 하지만 '쪽보다 푸른 동아시아 철학의 거인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는 부제처럼, 그 무게나 깊이는 결코 만만치 않다.
순자는 흔히 유가 사상의 정통이 아니라 이단으로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맹자의 성선설을 부정하고, 성악설을 주장하여 인간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누가 뭐래도 정통 유자이자,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를 넓히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한 공자 사상의 적자는 맹자가 아니라 순자라는 설명이다. 순자는 당대의 최고 학술 연구 기관인 직하학궁에서 대표 격인 좨주를 세 번이나 역임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순자는 또한 유가 학문의 지나친 도덕 이상주의와 운명주의, 숙명주의를 뼈아프게 공격하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묵가의 학문에서 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묵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유학을 현실주의적으로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 과 에 대한 장을 별도로 두었다. 유학의 주요 경전인 이 두 책은 순자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순자의 지분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 순자식 신유학의 대가인 율곡 이이의 사상을 살핀다. 율곡의 사상이 어떻게 또 얼마나 순자의 사상과 비슷하고 닮았는지, 순자적 문제의식과 사상의 치밀함을 어떻게 이어받았는지 상세히 보여준다. 율곡의 학문적 세례를 받고 율곡의 사상을 계승한 서인과 노론이 재배한 조선은 절대 성리학의 나라가 아니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순자와 율곡, 닮은 점이 너무 많은 두 학자의 사상을 보고 있으면 조선은 순자식 신유학이 지배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왜 우리가 더 순자를 주목해야 하는지 공감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율곡뿐만 아니라, 율곡과 순자 사이에 사상적 가교 역할을 했던 기대승의 사상도 언급한다. 한국철학사의 잊힌 천재 고봉 기대승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다. 단순히 중국 철학만이 아니라 조선 철학도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동아시아 철학의 큰 그림을 엿볼 수 있다.
"푸른 물감은 쪽풀에서 나왔지만 쪽풀보다 더 파랗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졌지만 물보다 더 차다."
순자의 이 말은 바로 자신을 가리킨 말인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했지만, 당대 현실에서 수세에 몰린 유학의 위상을 여러 제자백가의 사상 집대성으로 타개한 순자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744쪽, 3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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