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미국 뉴욕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쯤 북쪽으로 달리면, 코네티컷 주의 락스베리라는 자그마한 마을에 다다른다. 마을 한 어귀에는 내가 좋아했던 천안할머니가 잠들어 있는 마을 묘지가 있다. 할머니의 옆자리에는 그녀가 하늘나라로 떠나던 날, 눈물로 쓴 내 조시가 새겨진 비석이 앉아 있다. 그래서인지 바람이 불고 눈비 내리면 그곳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몸가짐을 가지게 되는 새해의 문턱에 들어설 때면, 나는 진정한 행복과 성공의 의미를 일깨워준 천안할머니가 그리워진다.
그녀는 나를 만나면 덤덤한 목소리의 내레이터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순진한 시골처녀가 천안으로 시집간 일, 하늘 같던 남편이 어린 자식들과 가난만 남겨 놓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 식당으로 시장으로 일거리가 있는 곳이면 겁 없이 달려갔던 일, 잠든 아이들 머리맡에 새벽 밥상을 차려 놓고 길을 나서면 땅거미가 내려서야 집으로 돌아오던 일, 도둑고양이처럼 꼬질꼬질한 얼굴의 5남매가 엄마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좋다고 와르르 판자촌 방에서 쏟아져 나와 맞아 주던 일, 자신은 학교를 못 다닌 까막눈이라 자식들만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는데 학교 한 번 찾아가 보지 못한 일, 미국에 오면 배고프지는 않다는 얘기에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챙겨 주고 싶은 욕심으로 겁 없이 고향을 떠난 일, 미국에서도 가난한 이민자는 따뜻한 밥 한 공기를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 등등.
그런데 천안할머니의 인생 다큐는 그녀의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보다 일찍 철들어 자수성가한 자식들도 모이면 어머니의 고생담을 지켜본 생생한 역사의 증인들이 되어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그런 어머니에게 존경을 표하고, 지극한 효심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천안할머니는 항상 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그저 나는 감사해유"라는 후렴구를 달고 사셨다.
세계적인 부호이자 저명한 투자가인 워런 버핏은 네브래스카대 강연에서 한 대학생이 "진정한 성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성공이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 나이처럼 늙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를 세우고 자선 만찬을 베풀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아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가 성공한 자라는 것이다.
매년 1월이 되면, 사람들은 새해에 꼭 꽃피우고픈 간절한 꿈 하나씩 달력에 걸어 본다. 학생에게는 성적 향상이, 직장인에게는 승진이, 주부에게는 새집 장만이 새해 소망일 수도 있다. 이런 구체적인 꿈도 중요하지만, 자칫 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만 달려가다가 정작 사랑으로 가꾸어야 할 주위의 소중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 우리는 만개할 꽃의 계절만 꿈꾸지 말고, 그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남겨질 열매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어야 한다. 실직한 남편이 돌아가 안길 수 있는 따뜻한 아내의 품이, 물려줄 재산 한 푼 없는 병든 노모가 업힐 수 있는 든든한 아들의 등이, 퇴직해서 인사권이 없는 선배에게 인생의 조언을 구하는 후배의 청담한 의리가 있는 진정한 성공을 이루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창 밖에 바람이 차다. 계절이 돌아 다시 겨울이 올 때쯤, 2016년 꽃이 진 자리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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