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 산사에서
이규보
고대광실 따뜻한 집 밤을 이어 잔치해도
부귀한 가운데선 맛도 맛이 아니거니
깊은 산 작은 절간 눈이 푹푹 쌓인 밤에
등걸불에 찬 막걸리 데워 먹는 맛만 하랴
華堂燠室宴連宵(화당욱실연연소)
富貴中間味易銷(부귀중간미이소)
何似山齋深夜雪(하사산재심야설)
閑燒柮榾暖寒醪(한소돌골난한료)
*원제: 冬夜山寺小酌(동야산사소작: 겨울밤 산사에서의 조그만 술자리)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 하증(何曾'199~278)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사치를 극도로 좋아하여 집과 수레, 의복 등이 국왕보다 오히려 더 으리으리하고 호화찬란하였다. 게다가 하증은 고금의 역사 속에서 그 짝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먹는 것에다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다. 하루 음식값으로 무려 만전(萬錢)이나 투자하고도, 도대체 젓가락을 댈 곳이 없다면서 투정을 부렸다. 하증의 작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하소는 놀랍게도 아버지의 이와 같은 수준을 획기적으로 뛰어넘었다. 그가 투자한 하루 음식값이 아버지의 갑절인 2만전이나 되었다고 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소도 아마 젓가락을 댈 만한 음식이 없어서 식사 때마다 괴로웠을 것이다.
식탁 위에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수두룩 빽빽한데 도무지 젓가락 댈 곳이 없다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날마다 산해진미만 계속 먹다 보면 산해진미도 더 이상 산해진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0만원짜리 한정식을 석 달 열흘 동안 삼시 세 끼로 계속 먹어보면, 처음에는 그토록 맛있던 음식들도 정말 진절머리나는 음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고대광실 따뜻한 집에서 밤마다 잔치판을 벌일지라도 부귀한 가운데선 맛도 맛이 아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 이 세 가지를 아주 혹독하게 좋아하여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렀다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 그는 지금 고대광실 대신에 깊고 깊은 산 속 절간에 있다. 이 세상천지간에 온통 함박눈이 푹푹 쌓여 추워도 몸서리 나게 추운 겨울밤, 그는 산해진미 대신에 등걸불에 막걸리를 따뜻하게 데운다. 이렇다 할 안주도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며 눈 쌓인 산사에 퍼져 나가는 미치고 환장할 막걸리 냄새! 아마도 그 무렵에 다시 눈발들이 '어구야꾸' 쏟아져 수천 수만의 흰 나비 떼들이 절간을 소복소복 덮었으리라. 이윽고 줄 없는 거문고 소리, 새로 지은 시를 낭랑하게 읊조리는 소리가 멀리멀리까지 퍼졌으리라.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금주(禁酒)의 공간인 산사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잔! 그 엄청난 맛과 그 엄청난 멋을 산해진미 따위가 감히 비교를 하려고 대들어? 참 건방지구나, 산해진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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