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반대한 루스벨트·레이건은
대통령 지위를 약자 위해 십분 이용
민생 입법촉구 서명 동참한 朴 대통령
자기 주장 펼 수 있는 경제계 위한 셈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벌들은 공화당 후보 윌리엄 매킨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힘입어 매킨리는 민주당 후보였던 급진 사회주의자 윌리엄 브라이언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1900년 대선에서 매킨리는 공화당 내 개혁주의자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서 재선에 성공했는데, 공화당 실세들은 재벌규제를 주장하는 루스벨트를 권한이 없는 부통령에 임명해서 입을 막아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매킨리가 두 번째 임기 초에 암살되자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재벌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모건, 록펠러 등을 상대로 독점금지 소송을 제기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란 지위 자체가 어젠다를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대통령이란 지위를 '뷸리 퓰핏'(Bully Pulpit)이라고 표현했다. '뷸리'는 강력하다는 의미이고, '퓰핏'은 신부나 목사가 설교하는 강단을 뜻하는 데, 대통령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어젠다를 설정하고 전파해서 국가를 움직일 후 있다는 의미다. 언론의 영향력도 잘 알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기자들이 백악관 밖에 기다리는 모습을 본 루스벨트는 그들을 백악관 내실로 들어오도록 해서 백악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게 했는데, 이를 계기로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만들어졌다.
대통령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루스벨트는 흑인 교육자이자 시민운동가인 부커 워싱턴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만찬을 같이했다. 대통령이 흑인과 백악관에서 만찬을 같이했다는 뉴스는 전국을 강타했고, 백악관에는 대통령을 비난하는 백인들의 우편물이 쇄도했다. 루스벨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흑인 차별을 철폐해 나갈 것임을 만찬으로 천명한 셈이었다.
루스벨트는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자연운동가 존 뮤어와 함께 여행했는데, 국립공원을 자연 그대로 보전하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임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동서냉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980년대에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도 대통령의 그 같은 지위를 십분 이용했다. 레이건은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미국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이스 셔틀 챌린저호가 공중에서 폭발한 날 저녁에 TV를 통해 한 연설은 상처받고 슬픔에 잠긴 미국민들을 위로하고 단합시켰다.
1987년에는 서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문을 열고 장벽을 허무시오"로 끝나는 유명한 연설을 해서 마치 2년 후에 있을 독일 통일을 내다본 듯했다.
1982년 5월 어느 날 레이건은 집무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메릴랜드 대학 근처에 살고 있던 흑인 가정이 주변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들이 백인 주민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앞마당에서 십자가가 불타는 일마저 일어난 것이다. 레이건은 그날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부인 낸시 여사와 함께 이 흑인 가정을 찾아가서 가족들과 담소를 했다. 대통령의 리무진 행렬이 목격되자 자연히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 사실은 언론에 보도가 됐다. 이 흑인 가정은 그 후 어떤 괴롭힘도 당하지 않았으며, 레이건은 인종차별이 결코 허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통령이 향유하는 '최고 권위'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경우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단체가 벌이는 '민생 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인 서명 운동'에 서명을 하자 많은 신문이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대통령이 아무리 답답하기로서니 경제단체가 벌이는 가두 서명운동에 이름을 올릴 수 있냐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앞장서서 서명을 했으니 너도나도 서명에 나서는 모습이다.
루스벨트와 레이건은 열등한 지위에 있는 흑인을 위해 대통령의 권위를 이용한 데 비해 박 대통령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경제계를 위해 대통령의 권위를 동원한 셈이니, 대통령도 대통령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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