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일의 생각] 공항 노숙의 추억

악천후로 제주공항이 마비되는 바람에 관광객들이 고생한다는 뉴스를 보다가 잊고 지내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20여 년 전 러시아 유학 당시에 겪은 일이다. 폭설로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어 '하얀 감옥'이 된 공항에서의 하룻밤이다.

모스크바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기자는 당시 며칠 짬을 내 카프카즈 지역을 여행했다. 영어로는 코카서스(Caucasus)라 부르는 이 지역은 산맥이 솟아있는 데다 온천이 발달, 휴양지로 명성이 높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외치며 종종 테러를 저지르는 체첸공화국에서도 멀지않은 곳이다.

그 먼 땅, 전통시장에서 백김치를 팔던 고려인 할머니를 만난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일어났다. 슬슬 착륙 준비를 할 무렵 기장이 모스크바 시내 4곳의 공항이 폭설로 모두 폐쇄됐다는 비보를 전했다. 1시간 가까이 선회하던 기장은 결국 기수를 돌려 1시간 비행거리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처음에는 신기한 경험을 해본다는 마음에 설레기도 했지만 예기치 못한 '여행 속의 여행'은 고통으로 이어졌다. 비행기에 탔다가 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 스튜어디스는 외국인들만 조용히 불러냈다. 그러나 내심 기대했던 '외국인 특혜'는 없었다.

필자와 아프리카 청년 2명 등 '이방인'들은 호텔 대신 딱딱한 공항 대합실 의자에서 자야 했다. 10월이라 두꺼운 외투도 챙기지 않았던 터라 냉기 가득한 휑한 공간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아침을 맞았다. 물론 청소하는 할머니가 나눠줬던 사과 반쪽은 이제껏 먹어본 최고의 사과였다.

더욱 잊지 못한 순간은 그 이후였다. 다시 오른 비행기에서 "호텔에서 자지 않았느냐"고 묻는 러시아 탑승객들의 오해를 풀어주던 중 스튜어디스가 밝힌 '깜짝 선물'과 탑승객들의 반응이었다. 밤새 고생한 고객들에게 따뜻한 우유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말에 모두들 박수를 치는 게 아닌가! 한국 같으면 난리법석이 났을 상황인데 웬 환호?

기자가 경험했던 '대륙의 여유'는 이제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제주공항에서 45시간을 보낸 관광객들을 제주도민들이 따뜻한 정으로 위로했다는 소식 덕분이다. 자신의 집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겠다는 시민들이 넘쳐났고,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노부부는 삶은 계란'고구마'귤을 내놓고 갔다. 제주에 정착한 한 방송인은 쌍화탕 드링크 1천 개를 나눠줘 미담의 주인공이 됐다.

제주에 발이 묶였던 체류객에 대한 수송 작전은 사실상 마무리됐다. 수만 명의 승객이 한꺼번에 몰렸지만 우려했던 큰 혼란은 없었다. 몇 시간씩 줄을 서 항공권을 받고서는 항공사 직원들에게 '수고하시라'는 인사를 건넨 분도 많았다고 한다.

기록적인 한파를 따뜻한 정으로 극복해낸 이번 일은 자랑해도 좋을 일이다. 공항 폐쇄가 천재지변인 탓에 피해 승객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의 조치는 어렵다고 하지만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