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구의 서울 생활, 어떻습니까?]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부장

"광개토대왕비에 한국 서예 독자성 잘 나타나…일본에도 영향"

▷1963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 출생 ▷고령 안림초
▷1963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 고곡동 출생 ▷고령 안림초'쌍림중 졸업 ▷경북고 졸업 ▷경북대 경영학과 졸업 ▷'광복 50주년 애국지사 유묵전'(1995년, 국무총리상) ▷'표암 강세황전'(2004년, 월간미술대상 장려상)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수석 큐레이터)

이동국(52)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한국의 대표적 서예 전시기획자다. 고교 때 서예반에서 처음 붓을 잡은 뒤 대학과 군 시절을 포함해 꼬박 7년을 서실에서 생활했다. 지금도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은 기획자이자 비평가이지 절대 작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축구 심판이 선수까지 겸하면 곤란하다는 논리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전, 표암 강세황전, 한국서예 2000년전 등 25년 동안 굵직굵직한 전시를 기획했고, '한국서가열전' '서예로 보는 우리 미학'을 언론에 연재하는 등 전시기획과 비평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는 한국 서예가 중국의 아류가 아니라 고유의 서체를 이어왔고, 중국에 견줄 만한 독자성과 권위를 갖추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로부터 한국 서예의 역사, 현대사회에서 서예의 의미와 정체성에 관해 들었다.

-서예는 언제 처음 접했나.

▶어릴 때부터 글씨를 쓰고 싶었다. 고교 때 담임선생님이 서예반을 만들었는데, 그때 처음 붓을 잡았다.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담임이 만류했다. '부모님이 시골에서 자갈논 팔아 공부시키는데, 서클활동이 웬 말이냐'는 이유였다. 결국 점심시간에만 주로 활동하겠다는 조건하에 허락을 받았다. 고교 2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했고, 학교 축제 때 작품전을 하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대학 서예 동아리에 들어가 봤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동아리 분위기가 붓글씨보다 유흥에 더 관심을 쏟는 바람에 결국 그만두고 1학년 가을에 대구 시내 서실을 찾았다. 돈이 모자라 3개월치만 내고 서실 청소하고 심부름하면서 다녔다. 군 입대한 뒤에도 단기사병으로 출퇴근하면서 밤에는 꼬박꼬박 서실로 향했다. 군 시절 50사단 대표로 군 사령부에서 주최한 진중작품전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예술의 전당에 들어간 계기는.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예술의 전당 공채 2기 모집공고가 났다. 예술의 전당 음악당과 서예관이 막 개관할 즈음이었다. 예술경영, 예술정보, 전시기획, 공연기획 등 4개 분야에서 각 4명씩 뽑았는데, 경영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600명이 지원한 예술경영 분야에 응시했다. 1989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지방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합격했다. 대학 때 여학생들이 많았던 미술학과 '도강'(도둑 수강)을 자주 한 전력이 큰 도움이 됐다. 입사 후 미술관과 예술자료관이 음악당과 서예관에 이어 2차로 개관했는데, 서예 기획하던 직원들이 대다수 미술관 쪽으로 옮기는 바람에 서예관에서 서예 경력을 살려 기획자로 일할 수 있었다. 예술의 전당 27년 중 25년을 서예 전시기획만 해왔다.

-기억에 남는 기획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전시, 표암 강세황전, 한국서예 2000년전 등이다.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전시는 100년 만에 일본에서 안 의사의 친필 유묵(遺墨)을 가져와 처음 한자리에 모았다. 이 전시는 글씨로 죽음을 초극한 안 의사를 통해 공모전이 중심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글씨가 사람의 정신을 발현한 것이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많은 지사와 선비가 있었지만, 그와 같은 존재는 없었다. 31세에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기까지 약 40일 동안 독립만세, 동양평화만세, 국가안위노심초사, 인내, 천당지복영원지락 등 글씨를 통해 독립과 동양평화를 외쳤다. 이 유묵을 통해 안 의사의 사상과 정신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사형 선고 이후 안 의사에 대한 한국인의 면회가 일절 금지된 상황에서 일본인 재판장과 간수 등은 안 의사의 인격에 감화돼 그의 글씨를 받기 위해 비단을 들고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한다.

-표암 강세황전의 특징은.

▶표암은 시(詩), 서(書), 화(畵)를 통틀어 18세기 문예사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예원의 총수로 단원 김홍도를 제자로 키웠고, 서화평도 뛰어났다. 시'서'화의 일체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 2003년 기획전 때 관객들의 관심도가 뜨거웠다.

-한국서예 2000년전의 의미는.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한국 서예 역사를 한 줄로 꿴 전시였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한국 서예를 4세기 중반 중국에서 활동한 왕희지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보기도 했는데, 이 전시를 통해 중국 서예와의 공통점뿐 아니라 한국 서예의 독자성과 특징을 잘 드러냈다.

-한국 서예의 독자성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나.

▶광개토왕비(414년)에 나타난 글씨가 대표적이다. 왕희지가 중국 대륙에서 양쯔강 이남 '동진'을 대표했다면, 600여 년간 고구려에서 사용한 광개토왕비의 글씨체는 중국 대륙 절반의 역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백제와 신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서체는 예서 중에서도 전서의 필획과 예서의 결부를 갖고 있는 과도기적 글씨로,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을 나타내면서 내용도 군사'문화적 힘을 상징하고 있다.

광개토왕비와 함께 신라 통일 직전의 진흥왕순수비, 통일신라 김생, 고려의 탄현, 조선 안평대군, 한석봉,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이 한국 서예의 맥을 잇고 있다. 이 같은 한국 서예는 중국 왕희지와 함께 안진경, 구양순, 소동파, 조맹부, 조지겸 등과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독자성을 갖고 있다.

-어떤 글씨를 좋은 글씨로 보나.

▶잘 쓰고 똑바로 쓴 글도 좋은 글일 수 있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의 성정, 기질을 잘 드러내고, 감정을 잘 녹여낸 것이 좋은 글씨라고 생각한다. 글씨는 예술이고, 수양의 하나다.

요즘 글씨는 공모전에서 상을 타기 위해 스승의 글씨를 본뜬 글씨, 개성이 없는 글씨가 많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도 아름다운 글씨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 서예의 역사와 깊이 등이 담기면 더 좋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예를 한 사람이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하면 역사적인 무게와 격조도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평가할 만한 서예가는.

▶김생은 8세기 통일신라 화엄불국의 정신과 아름다움의 귀감을 글씨로 담아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김생의 글씨를 '3만 근의 무쇠로 만든 활을 당기는 힘을 가진 글씨'라고 평했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은 풍류사상을 글씨에 담았다. 그의 토황소격문과 쌍계사 진감선사비 등을 보면 샤머니즘을 토대로 중국에서 온 유교와 도교, 인도의 불교까지 아울렀다.

고려의 탄현은 귀족적이고 유려한 고려청자의 미감을 잘 드러냈고, 조선의 퇴계 이황은 엄정하고 단아한 도학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안평대군은 조맹부의 글씨를 받아들이되 독창적으로 만들어 조맹부를 능가했다.

18세기 원교 이광사는 유배지에서 평생 글씨만 쓰다 죽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옆에 창 하는 사람을 세워놓고 글씨를 썼다. 그의 행'초서를 보면 춤을 추는 것 같은 글씨다. 전남 해남 대흥사 침계루의 글씨는 마치 물이 콸콸 흐르는 듯하다.

한국 서예의 백미는 추사 김정희다. 추사는 동아시아 서예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다. 중국, 일본 서예사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 서예 흐름을 총정리했고, 새로운 근현대 서예의 문을 열었다.

-서예진흥법 발의를 주도한 배경은.

▶최재천 국회의원이 서예진흥법 제정운동의 대표를, 내가 간사를 맡았다. 최근 3년 동안 9차례의 심포지엄을 열었고, 지난해 최 의원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 119명이 공동 발의했다.

서예 교육의 필요성, 문화복지와 문화산업, 예술로서의 서예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예진흥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구 문화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동아시아 문화 정체성의 핵심이 서예인데도 서예에 대한 관심과 육성책이 너무 소홀하다.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서예를 초'중'고부터 대학까지 교육한다. 79개 대학에 서예과가 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5, 6개 대학에 서예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1개 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폐과됐다.

서예는 디지털 시대 인간성 회복의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문화복지 차원에서 청소년과 노인들의 인성을 가장 잘 가꿀 수 있는 요소다. 디자인 측면에서 문화산업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글씨는 인간의 눈과 얼굴 같은 요소로, 캘리그래피에서 정체성을 잘 드러낼 수 있다.

서구에서 오히려 서예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부끄럽다.

미국 LA카운티박물관이 2018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 미술의 역사와 관련한 3가지 특별전 시리즈를 갖는데, 2018년 가장 먼저 '한국서예전'을 기획했다. 이후 2022년 한국현대미술전, 2024년 한국근대미술전 등이 이어진다. 내가 이 특별전을 기획한 학예실장과 책임 큐레이터에게 '그림, 도자기, 불화 등 분야가 많은데, 왜 한국에서도 관심이 낮은 서(書)를 먼저 하려고 하느냐'고 하자, '서가 모든 예술의 기본(Basic) 아니냐'고 정곡을 찔렀다.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기획은.

▶동아시아 전체를 서예를 통해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획을 해보고 싶다. 한'중'일이 영토적으로는 서로 많이 싸우지만, 붓만 쥐면 하나로 통한다. 남북도 정신적 통일이 우선돼야 한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비협조적이지만, 우리가 주도하면 양국의 호응을 이끌 수 있다.

캘리그래피와 같은 현대미술, 공연 등과 서를 융합하는 기획전도 추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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